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교실에는 가느다란 주철 책상과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책상 위는 휑하게 비어 충전 패드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교실의 앞쪽에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칠판이 걸려 있었다.
칠판에는 이욱(李煜)의 《우미인(虞美人)》* 한 수가 적혀 있었다. 분필로 손수 쓴 글씨는 제법 훌륭했지만, 마치 거열형이라도 당한 듯 획 하나하나가 작가 본인의 삶보다 더 기구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마지막의 ‘일강춘수(一江春水)***’는 거의 피에 뒤덮인 상태였다.
*포로로 잡혀온 이욱이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로, 격노한 송태종에게 독살당했다.
**남당의 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 송태조에게 나라가 멸망당해 포로 생활을 하였음.
***흐르는 봄 강물이라는 의미. 결미의 《묻노니, 그대의 시름은 얼마나 되는가? 동쪽으로 흐르는 봄 강물 같구나.(問君能有幾多愁?恰似一江春水向東流。)》라는 구절의 일부.
작은 교실은 살인 사건 현장을 방불케 했다.—— 다리가 부러진 책상과 의자가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고, 사면의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에는 차마 자세히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균열들이 나 있었다. 조명도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칠판 근처의 작은 형광등 하나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채,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필사적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혼혈처럼 생긴 남자가 다친 다리를 끌며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남성의 모델링과는 달리, 그의 이목구비는 꽤 수려했지만 어째서인지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어떻게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튼 기질이 매우 독특했고, 보기만 해도 팔자가 몹시 사나워 보였다.
그는 온몸의 근육을 진짜처럼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생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닥의 작은 상호작용 패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교실’ 역시 홀로그램 공간의 배경이었다. 상호작용 패널에는 ‘외부와 통화 중’이라는 문구가 표시되어 있었다.
5분이 지났음에도 상대방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떠나기 전, ‘그 분’이 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 ‘나’는 조금 고독하고 사람을 잘 상대하지 않는 구석이 있어서 신뢰를 얻기도 쉽지 않을 거야. 다행히 그 시절은 ‘실낙원(失樂園)’의 시대였으니, 사람들도 꽤 순수했고, 그 시절의 나도 아직 온화한 편이었어. 만나더라도 너무 긴장하지 마. 연락만 닿아도 절반은 성공한 거니까.”
‘그 분’은 그를 이곳으로 보낸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 분을 ‘일식(日蝕)’이라 불렀다.
그 분의 성별도, 나이도, 종족도…… 심지어는 그 분이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분은 마치 가상세계를 떠도는 유령 같았다. 과묵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으며, 가끔 공격을 자인할 때만 성명을 하나 발표했다. 그마저도 표현이 워낙 정중해서 작은 식당의 휴업 안내문 같았다.
오직 손에 쥔 도살용 칼만이 끊임없이 피를 뚝뚝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세상은 이미 지옥이었다.
광기에 찬 문학 작품들이 그리워하던 ‘실낙원’ 시대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절해서 길가에서 낯선 사람을 아무나 붙잡아도 적당한 작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은 정신이 나간 헛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는 일식의 말을 한 마디도 믿지 않았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예상대로 ‘실낙원’ 시대의 일식조차 그의 상상보다 훨씬 위험했고, 훨씬 변덕스러웠다.
상대는 한 달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절망에 빠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바이러스까지 심어 놓았다. 그가 마지막 경계심을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얼굴도 마주하기 전에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 세계의 일식은 ‘세 번째 말’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세기쯤 되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른 끝에 통화가 끊겼고, 상호작용 패널에 새 메시지가 하나 표시되었다.
옅은 갈색의 오른쪽 눈이 순식간에 은백색으로 바뀌며 수없이 많은 데이터가 흘러가더니, 순식간에 분석이 완료되었다. 이 메시지에 악성 바이러스가 들어 있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판정이었다.
그는 그제야 이를 악물고 폭탄을 해체하듯 그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깨끗했다. 상대는 물음표 하나만 보내왔다.
남자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어지럽게 캄캄해질 정도였다.
마침내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부디 11월 25일의 림보 우편함을 확인해 주십시오. 그 안에는 미래의 당신께서 보내신 선물과…… 제 좌표가 들어 있습니다. 부디 저에게 당신을 직접 뵐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그는 완전히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이 고장 난 골동품 디스플레이처럼 깜빡이기 시작했고, 삼원색의 실오라기들이 제멋대로 온몸에서 날뛰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픽셀 더미로 분해될 것만 같았다.
반면 그가 있는 이 교실은 너무도 현실 같았다. 심지어 외부의 시간과 동기화되어 빛마저 변화하고 있었다.
밤은 마치 짙은 먹에 맑은 물이 스며든 듯 점점 옅어지고 맑아졌다. 교실의 창문 한 줄이 새벽빛과 함께 창백하게 밝아왔고, 네모반듯한 모양은 꼭 늘어선 엄숙한 묘비처럼 보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형광등이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꺼지는 순간, 교실 문이 밖에서 열렸다.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커다란 부엉이 한 마리가 문간에 선 채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글둥글한 몸집은 어린이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어 인형 탈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부엉이는 림보 공간의 마스코트이자 지혜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였다. 하지만 일부 동양 문화에서는 ‘야효(夜鴞)’라는 옛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꿈에서 깰 때 죽음을 알리는 요괴이자 귀차(鬼車)*라고도 전해졌다.
지금 이 인간형 부엉이는 역광을 등지고 선 채, 어딘가 뱀을 떠올리게 하듯 커다란 연노란 눈으로 차가운 심문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깃털로 뒤덮인 얼굴에는 불길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중국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머리가 아홉 달린 불길한 새.
홀로그램 세계에 로그인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홀로그램 세계에서는 마음대로 ‘얼굴을 빚을’ 수는 없었지만, 보정하는 것은 가능했고, 일반적으로는 아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 할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조금 더 익명성을 원한다면 나이, 종족, 성별과 스타일 키워드 한두 개를 입력하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모델링을 생성해 주었다.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으면 림보 공간은 기본 이미지를 생성했다. 바로 통통한 부엉이였다.
이것이 홀로그램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공용 ‘가면’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남에게 떳떳하지 못 하다고 느낄 때 부엉이로 변했다. 예를 들어 성인 영화를 보거나, 회색 거래를 하거나…… 혹은 업무용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일을 할 때처럼 말이다.
두헝에게는 홀로그램 계정이 하나뿐이었다. 업무용이었고, 일이 없으면 접속하지 않았다.
단골 고객들은 모두 그녀의 업무용 전화를 알고 있었다. 신규 고객도 대개는 단골 고객의 소개를 통한 것이었기에 연락은 모두 문자나 전화로 해결했다. 홀로그램 우편함은 얼마나 오래 확인하지 않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라 스팸 메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몇 분 전으로 되돌리면——
두헝은 번역체 말투의 청년의 메시지를 따라 날짜를 추적하여 11월 25일 우편함에서 초라한 흰 봉투 하나를 찾아냈다. 화려한 광고 메일들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오히려 눈에 잘 띄었다.
흰 봉투에는 몇 글자가 단순하고 투박하게 적혀 있었다.
‘내부에 살아 있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 즉시 확인 바람.’
좋다.—— 재수 없는 명조체였다. 정렬도 안 맞고, 가운데 정렬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구두점도 없었다.
그 글자를 한참 바라보던 두헝은 확실히 자신의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엉이 주머니에서 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부엉이 날개는 장식일 뿐으로 안에는 손이 있었다.
장갑의 뒤쪽에도 울퉁불퉁한 명조체로 ‘격리 장갑’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봉투와 나란히 놓고 보니, 쯧, 참으로 위화감이 없었다.
이 격리 장갑은 홀로그램 세계 전용으로, 의심스러운 물건을 만질 때 바이러스를 차단해 주었다. 두헝이 동종업계 사람에게 500위안을 주고 사 와 개조한 것이었는데,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오늘 그 납치범 해커의 수준을 보면, 두헝과 그 쓸모없는 동종업계 사람을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과찬일 것이었다.
쓸모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두헝이 이것을 끼는 것은 순전한 의식에 불과했다. 이 계정의 자산 창고는 바이팅루가 핥고 남은 요거트 뚜껑보다도 더 깨끗해서 지킬 만한 것도 없었다.
장비가 손상되는 문제라면…… 헬멧이 망가지면 홀로그램 관련 업무는 취소하고 앞으로는 스마트 가전 수리에나 전념하면 그만이었다. 땀 흘려 돈을 벌고 말지, 이 일은 정말 못 해 먹겠다.
봉투는 찢자마자 자동으로 사라졌다. 두헝의 손에는 B5 크기의 작은 책 한 권이 남았는데, 표지는 새하얀 공백이었다. 이번에는 대충 붙인 파일명조차 없었다. 한가운데에 조잡한 지문 인식기만 달려 있었고, 어느 손가락을 대야 하는지 설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두헝이 책을 펼쳐 보자 안쪽도 모두 백지였다.
이게 뭐야, 무자천서(無字天書)*인가?
*글자가 없는 하늘의 책.
속성을 확인하려 했지만 상호작용 패널조차 불러올 수 없었다. 그녀는 별 수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책을 덮고, 장갑을 벗은 뒤 지문 인식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모두 올려놓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럼 이걸 왜 준 거야. 사람을 놀리는 건가?
어리둥절하게 한참 동안 무자천서를 들여다보던 두헝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왼손의 중지를 올려보았다.
순식간에 지문 인식기에 활성화된 흰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그녀의 눈앞에 전송문 하나가 나타났다.
“……”
정말…… 너무 이상했다.
사람의 중지는 유연성이 높지 않았기에 왼손 중지로 지문 잠금을 해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두헝은 자주 누운 채로 ‘노인용 휴대폰’을 보았다. 휴대폰을 한 손으로 오래 들고 있다 보면 얼굴 위로 떨어뜨리기 쉬워 종종 왼손으로 뒤를 받쳐 고정시키곤 했는데, 그러면 왼손 중지가 마침 지문 인식 모듈의 근처에 닿게 된다. 때문에 지문 인식이 필요한 곳에는 습관적으로 그 손가락도 등록해 두곤 했다.
봉투도, 뜬금없는 무자서(無字書)도…… 전부 조악하기 짝이 없어 무어라 묘사할 것도 없었지만,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에 이상할 정도로 낯익은 느낌이 배어 있었다.
거기에 전화 속 ‘번역체 말투의 청년’이 했던 말까지……
두헝은 ‘가상 인간의 반란’도 믿지 않았는데, 하물며 ‘시공간 초월’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독심술?
이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시공간 초월보다도 못했다.
전송문에 들어가기 전, 두헝은 불안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자신의 감각 차단율을 확인했다.—— 좋다. 여전히 2%였다. 뼈를 깎아 독을 빼는 치료를 받아도 아프지 않을 수준이었고, 언제든 헬멧을 벗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전송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피비린내 나는 교실에 압도되어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고, 지혜로운 표정으로 방 안의 그…… 음, 가상 인간인지 진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부상자와 멀뚱멀뚱 눈만 마주치게 되었다. 공기 중에 은은한 어색함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모두 허공과 같고 꿈과 같다’더니.
같은 공기를 마셔도 두헝은 어색함을 들이마셨지만, 이 공간의 다른 한 사람은 질식감만을 느꼈다.
*불교의 육경(六境)으로, 6가지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인식하는 외부 세계의 6가지 대상을 의미.
청년은 그 무기질적이고 냉혹한 시선에 눌려 고개를 숙인 채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일식’ 각하.”
‘일식 각하’는 헬멧을 꽉 움켜쥐고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침묵이 번져 나갔다. 무색무취의 공기 속에 더욱 복잡한 의미가 섞였다.
어색함을 넘어 공황에 빠지기 시작한 두헝은 참지 못 하고 자신의 감각 차단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좋다. 여전히 안전한 2%였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홀로그램 자산’ 항목에 빨간 점이 하나 생긴 것을 발견했다.
두헝은 잠시 멈칫하다 눈을 깜빡이며 열어보았다. ‘새하얗게 텅 비어 아주 깨끗한*’ 자산 창고에 세 가지가 추가되어 있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작은 책 한 권과 가상 공간 하나…… 그리고 ‘부속인’ 하나였다.
*드라마 《홍루몽(红楼梦)》의 OST인 비조각투림(飛鳥各投林)의 마지막 가사인 ‘끝내 새하얗게 뒤덮인 대지만 남아 참으로 깨끗하구나(落了片白茫茫大地真乾淨)’를 이용한 말장난.
‘운명’은 아마 지문 잠금이 달린 그 무자서를 가리키는 것 같았고, 가상 공간은 십중팔구 눈앞의 이 공포 영화 촬영장일 것이다. 두헝이 공간 좌표를 흘끗 보니, 좌표 안에는 깨진 문자열까지 들어 있어 매우 기괴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합친 것보다도 그 ‘부속인’이라는 것만큼은 기괴하지 않았다.
‘부속인’은 또 무슨 귀신 같은 물건이란 말인가?
가상 인간도 물론 가상 자산에 해당하지만, 자산 창고에서 그들의 기본 명칭은 ‘친구’였고 아이콘은 계약 두루마리였다.
하지만 ‘부속인’의 아이콘은 갈색 곱슬머리를 한 사람의 작은 두상이었다.
마치 사람이 자산이 된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되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건가?
‘부속인’의 이름도 깨진 문자열이었지만 다행히 속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두헝은 깨진 문자열 청년의 속성을 열어 보고는 다시금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상 인간의 속성 패널의 첫 세 항목은 제조사, 모델명, 제품 일련번호였다. 그런데 이 깨진 문자열 청년의 첫 번째 항목은 무려 ‘감각 차단율’이었고, 그 뒤에는 각종 외형 파라미터들이 이어졌다.
잠깐만, 이건 진짜 사람 계정의 속성 패널 아닌가?!
왜 자신이 남의 속성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왜 이 ‘남’이 자신의 ‘자산’에 속하는 것인가?
이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 위반이 아닌가?
그리고 ’감각 차단율 100%’는 또 뭐지?
의식이 몸을 벗어나서 홀로그램 공간으로 환생이라도 했다는 건가?
더 넘겨 보니 기본 정보 뒤에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생체 정보가 이어졌다.
두헝은 모두 건너뛰었다.—— 만약 이 깨진 문자열 청년이 진짜 사람이라면, 이 자료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화장실에서 코를 파는지까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맙소사. 절대로 알고 싶지 않았다!
모든 생체 정보를 한 번에 건너뛰고 나니, 뒤에 두루마리 계약서가 하나 있었다. 가상 인간을 바인딩할 때 쓰는 계약서와 매우 비슷했다.
두헝은 거의 감동할 뻔하였다. 드디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나왔다.
그런데 막상 펼쳐 보니 그 안에는 ‘바인딩 해제’ 항목도 ‘계약 양도’ 항목도 없었고, ‘해고’ 항목만 있었다.
“……”
두헝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질 만큼 헤매더라도 길을 묻지 않는 ‘후천적 실어증’이었다. 평생의 유일한 한이라면 광합성을 할 수 없다는 것, 식물처럼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두헝은 혼란스러울수록 더 침묵했고, 다른 사람 눈에는 더 위험해 보이게 되었다.
깨진 문자열 청년은 눈으로 흘러드는 식은땀도 아랑곳 않고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이 많을수록 실수도 많은 법인지라, 그는 조용히 상대가 먼저 질문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 이르러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십 년의 ‘시차’는 거대한 인식의 간극을 만들어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안할 때 캐묻는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듯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바이러스를 보내는 스타일을 보건대, 깨진 문자열 씨는 자신이 언제든 버튼 하나로 소멸되어 데이터 난류가 될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문 그는 기꺼이 모험을 감수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계신 시대에는 아직 ‘의식 업로드 기술’이 없겠지요?”
없기만 하겠는가. 두헝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각 시뮬레이션도 이제야 최첨단인데.
그녀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가만히 귀를 세우고 저 깨진 문자열 인간이 알아서 계속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남자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듯 30초를 버티다가,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첫 걸음에서 지뢰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말을 이었다.
“68년 후, 우리는 육체를 버리고 의식을 완전히 업로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육체가 죽더라도 생전에 전용 신탁을 설립해 두기만 하면 디지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지불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사람들은 전자 생명의 형태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헝의 금융 상식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어서 상승장이 하락장보다 길하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었다. 그래도 ‘신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면 최소 수백, 수천만의 입장료가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래 세계는 물질이 극도로 풍요로워진 건가? 다들 이렇게 부자란 말인가!
“물론 자신의 신탁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저처럼 ‘부속인’이 되어 자원을 제공하는 측과 ‘고용’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고되면, 부속인은 72시간 안에 새로운 고용주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홀로그램 계정이 삭제됩니다. 다만 제 상황은 조금 더 특별합니다.”
남자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눈앞의 부엉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가상 공간 안의 진짜 같은 새벽빛이 점점 밝아지며 부엉이의 거대한 몸이 그림자를 드리워, 불길한 산처럼 묵직하게 그를 뒤덮었다.
“제 고용주는 당신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는 아직 부속인 고용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께 해고당하면, 저는 새로운 고용주를 찾을 방법이 없어 72시간 뒤에는 데이터 조각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 부디 제 충성을 믿어 주십시오.”
두헝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과 함께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이 깨진 문자열 씨는 ‘부속인’이라 쓰고, ‘노예’라고 읽는 존재인 것이었다. 계약서의 버튼 역시 쓰여 있는 것은 ‘해고’였지만, ‘처형’이라 읽는 것이고?
미래 세계는 완전히 끝장난 게 분명했다. 역사가 은허(殷墟)* 시대까지 역주행했구나!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시에 있는 은대(殷代) 중기 이후의 도읍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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