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흉포한 사슴(7)
2026. 6. 28.

헬멧을 억지로 벗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 종료 방식이었다. 장비도 손상되고, 사람에게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멧에서 빠져나온 두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지러운 머리와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저녁에 먹은 두 입짜리 밥을 전부 토해내는 것이었다.

평소 그녀처럼 허약한 사람은 가끔 쪼그려 앉아 물건 하나를 줍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난리를 치곤 했다. 이런 한밤중에 귀신을 보는 것은 너무나 강렬한 수준의 자극이었다.

 

몇 분이나 지나서야 두헝의 눈앞을 맴돌던 별들이 흩어졌고, 그녀는 벽을 짚고 일어나 입을 헹궜다.

차가운 물에 자극을 받자 이성이 천천히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간신히 유물주의 전투…… 아니, 유물주의 비전투요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홀로그램 세계의 모든 심령 현상은 인공적인 특수효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녀에게 누구냐고 물었던 그 입은 십중팔구 지금 경찰서를 인질로 잡고 있는 해커일 것이다.

있는대로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두헝은 이를 갈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를 꺼낸 뒤, 홀로그램 장비를 한 번 검사하며 혹시라도 모를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했다.

 

하지만 그녀 치아의 법랑질도 그리 두껍지는 않았으니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때문에 두헝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능숙하게 자신의 심리 상태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자신을 강제 로그아웃시켜 하마터면 뇌진탕까지 입을 뻔했지만, 십만 번 양보해서 생각하면 놀라 정신없이 헬멧을 벗어버린 그녀 자신에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물론 상대가 그녀의 엿보기 거울을 삼켜 버리긴 했다. 하지만 그 역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화낼 가치가 있을까? 그녀의 간은 밤낮이 뒤바뀐 생활에 어울려 주느라 이미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데,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들고 와 간 대감을 더 괴롭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엿보기 거울은 백업해둔 것이 있었으니 하나 복제하면 그만이었다…… 음, 겸사겸사 조금 손을 봐 엿보기 거울을 업그레이드해 주면 되겠다.—— 두헝은 겸사겸사 이 일을 ‘할 일(미루기) 목록’에 적어두었다.

 

어찌되었든, 눈에 보일 정도로 기술 수준에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복수하는 대신 자신을 설득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 건방진 해커를 용서하고, 경찰이 알아서 법으로 처리해 주기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검사 프로그램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고 경찰 쪽에서도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심심해진 두헝은 스크린샷을 찍을 때 흘낏 본 가상 디스크의 모델명과 가상 인간 코드를 검색창에 입력했다.

그녀가 한 번 슬쩍 본 것으로 숫자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열여덟 자리짜리 문자열을 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 ‘용의 가상 디스크’의 코드가 특별했던 것이다. 그것은 S로 시작했다.—— 이는 림보 공간이 정식 서비스되기 전에 존재했던 오래된 물건으로, 실험실에서 생산된 제품이었다. 코드를 구성하는 숫자와 알파벳에는 모두 의미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가상 인간의 ‘생년월일’과 소속된 실험실 정보가 들어 있었다.

이 코드 체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한 번 보기만 해도 자동으로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유일하게 기억하기 어려운 것은 여섯 자리의 실험실 코드였다. 하지만 ‘용의 가상 디스크’의 이 여섯 자리 코드는 마침 두헝이 눈을 감고도 외울 수 있는 번호였다.—— 그녀의 모교 실험실 코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가상 인간의 ‘생년월일’은 9년 전, 정확히 그녀가 재학 중이던 시기였다. 당시 학생용 캐리어 디스크는 재활용해 서로 돌려가며 사용했으니, 어쩌면 그녀도 그 디스크를 만져 본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감회가 새롭구나. 두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절 만졌던 캐리어 디스크는 이렇게 출세했는데, 자신은 공기에 9년 동안 산화되었고, 세월은 그녀에게 녹슨 인생 한 토막만을 남겨 주었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던 두헝의 마음이 다시 정전기에 끌리듯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하며 입안이 씁쓸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헝은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충동에 이끌려 졸업생 계정으로 모교의 실험실 데이터베이스에 로그인했다.—— 그저 한번 둘러보는 것일 뿐, 별다른 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설령 무언가를 찾아낸다 해도 굳이 나서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찾아낼 수 있을 정도라면 경찰이 발견하는 것도 시간 문제에 불과할 테니까.

그저 오래전에 죽었던 호기심이 잠깐 되살아났을 뿐이었다…… 어?

두헝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데이터베이스에는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고 표시되었다.

 

사실 그녀의 학교는 당시의 무슨 내노라할 명문이 아니었고, 실험실의 일상적인 관리도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렀다. 그저 손이 가는대로 검색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헝은 폐기된 캐리어 디스크 무더기가 이리저리 떠돌다가 중고시장에서 팔려나가, 실력 좋고 대담한 그 해커의 손에 들어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 신청 기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설마 고장 난 디스크여서 한 번도 쓰지 않고 바로 폐기되었던 걸까?

 

잠시 망설이던 두헝은 익숙하게 학교의 정보 관리 시스템을 해킹해 동일한 구분의 캐리어 디스크 구매 기록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구매 기록에도 이 문제의 디스크의 번호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그때 당시에 번호를 하나 빼뜨리고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이 디스크는 입고되기 전에 이미 분실되었던 걸까?

이렇게까지 우연이 겹칠 수 있나?

 

바로 그때, 컴퓨터의 AI 비서가 대화창을 띄우며, 어떤 파일 안에 그녀가 검색한 바이오 캐리어 디스크 코드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왔다.

처음에는 제대로 반응도 못 하던 두헝이 무심코 그 파일을 클릭해 확인하자,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파일이었다.

 

그녀는 불필요한 소비는 절대 하지 않는 구두쇠인지라 물건이 그럭저럭 쓸 만하면 절대 새것을 사지 않았다. 그래서 컴퓨터도 아직 10년 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고, 학생 시절에 작성한 문서와 과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바이오 캐리어 디스크의 신청서와, 그 디스크를 사용해 만든 과제 같은 것들 말이다.

두헝은 9년 전 자신이 직접 작성했던 바이오 캐리어 디스크의 신청서를 마주보았다. 19세기 런던처럼 안개가 자욱했던 머릿속에서 사시사철 걷히지 않던 짙은 안개가 마침내 충격에 날아가 흩어졌다.

 

【036호 가상 인격 실험체, 코드명 ‘샤오루(小鹿)*’, 제작 연구원 두헝(5-580). 2XXX년 12월 24일.】

지금 홀로그램 공안국을 납치하고 있는 범죄 용의 디스크의 것과 신청했던 캐리어 디스크의 번호가 완전히 동일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이건 말이 안 된다!

*사슴이라는 의미.

 

두헝은 재빨리 학교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당시 제출했던 신청서와 과제를 뒤져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적혀 있던 바이오 캐리어 디스크의 번호는 그녀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완벽주의자가 아닌 그녀에게는 과제를 제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정하는 습관 같은 것이 절대 없었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면…… 누군가가 그녀처럼 학교의 정보 관리 시스템을 해킹해, 이 캐리어 디스크와 관련된 기록을 지워 버렸다는 것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한 달 전, 한 사람이 죽었다. 그녀는 그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 불운한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살인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었고, 무례하게도 범인까지 미리 스포일러해 주었다.—— 그 범인이 바로 그녀 자신이라고.

한 달 뒤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정신질환자가 가상 인간이 사람을 죽였다고 신고를 했다. 그리고 경찰이 가상 인간의 캐리어 디스크를 조사하던 중, 디스크 안의 바이러스에 의해 홀로그램 공안국이 납치당해버렸다.

 

게다가 기록에는 그녀가 그 문제의 캐리어 디스크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니, 공식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 기록이 조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더 의심스럽지 않은가?!

 

학교의 교육용 데이터베이스를 조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형사 범죄에 해당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놈은 조작하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나 했을까?

시간 위장 기술로 파일을 바꿔치기 하면 일반 관리자 정도는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시 검증까지 우회하고 경찰의 전문 디지털 포렌식까지 속일 수 있단 말인가?

 

두헝은 숨이 턱 막혔다. 일년 내내 바닥에 머무르던 혈압이 머리끝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날벼락이 그녀의 머리에 떨어졌단 말인가? 그녀는 지나가던 개보다도 더 무고했는데 말이다!

 

스트레스에 휩싸인 두헝은 본능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홀로그램 공간과 인터넷에 남겨 둔 자신의 모든 흔적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낡아빠진 컴퓨터가 숨이 막힌 풀무처럼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더니,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를 하나씩 표시했다.

 

두헝은 손톱을 모조리 물어뜯고서야 마침내 피해망상에서 벗어나 조금씩 차분해졌다.

이성이 돌아오자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함정에 빠뜨려서 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집안은 조상 팔 대가 모두 평범한 서민이었다. 숨겨진 출생의 비밀도 없었고, 그녀가 물려받을 주식 지분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평소에 자주 마주치는 이성이라고 해봤자 택배 기사뿐이었고 그녀는 비구니보다도 더 욕망 없는 인간관계를 갖고 있었으니, 어떠한 감정적인 문제에 휘말릴 조건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다른 누군가와 원한이라도 쌓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게 무슨 농담인가.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만만하게 보일 뿐인 못난이였고, 그런 기능은 애초에 탑재된 적이 없었다!

 

한 광년즈음 양보해서 정말 나쁜 사람이 있다고 한들, 그녀의 5만 위안도 안 되는 계좌 잔액을 노릴 정도로 형편 없는 놈이라면 차라리 그녀의 카드를 훔쳐 쓰는 것이 공안국을 납치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았겠는가.

 

외계 정신질환자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 보아도 두헝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그녀는 결국 문제의 ‘용의 디스크’로 만들었던 과제를 클릭해서 열어보았다.

몇 줄을 읽어내려가자 두헝의 죽었던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이것은 가상 인간을 설계하는 커다란 과제였는데, 그녀는 ‘데드라인’ 직전까지 미루다가 밤낮없이 작업해 겨우 하나를 완성해서 제출했었다. 이름을 정성 들여 지을 시간도 없었다. 당시 책상 위에는 학교 식당에서 받은 사과가 하나 있었고, 포장지에는 사슴 두 마리가 추상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상 인간의 이름을 대충 ‘샤오루’라고 명명해버렸다.

그 과제는 매우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지도교수는 그녀에게 바이오 캐리어 디스크를 도로 가져가서 수정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두헝의 사전에서 ‘권한다’는 말은 곧 ‘안 해도 된다’는 뜻과 같았다. 어찌되었든 그녀의 지도교수는 성격이 좋았고 평소에 출석 점수도 후하게 주는 편이었으니, 태도만 괜찮다면 그녀를 낙제시키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인자한 스승 밑에 반항하는 제자가 나오는 법이라고, 두헝은 마음 편히 계속 미루기만 했다. 캐리어 디스크도 반납하지 않은 채 상자 밑에 처박아 두었다가, 아마 시간이 지나 이사할 때 전자 쓰레기와 함께 버렸던 것 같았다.

 

첨부 파일에는 설계 아이디어에 대한 설명서가 하나 있었다. 두헝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자신의 학술적 흑역사를 열어보았다.

제목은 ‘인공지능의 자아의식 형성’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로 시작해 온갖 헛소리로 가득한 그 쓰레기 같은 글은 아무런 근거 데이터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완전히 이성적인 두뇌는 외출할 때 신을 양말 하나도 결정해내지 못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공지능은 방대한 정보를 학습해 겨우 인간의 행동을 피상적으로 모방할 뿐, 진정한 의미의 ‘자아’를 갖추지 못 했다. 중국어에서 소위 ‘인격(人格)’이라는 말은 ‘인간만이 가진 것’임을 강조하지만, 영어에서의 ‘인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가면’에서 비롯되었다. 올포트(Allport, Gordon)*는 1937년 출간한 『Personality: A Psychological Interpretation』에서 인격을 ‘개체 내부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심리 체계의 독특한 동력’으로 정의했다. 우리는 그 중 핵심 요소를 뽑아내 이에 대해 몇 가지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인격이란 인간만이 가진 것으로,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인간의 행동은 효과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의도에 대해서는 고찰하는 것만이 인간행동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인격이란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는 도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성취나 행복을 추구하도록 태어난 생물이 아니며,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근본적인 논리는 고통을 피하고 공포를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가상 인간에게 진정한 인격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완전한 공포와 고통 알고리즘을 구축하는 것이지, 제품 설명서에 ‘전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 ‘지식과 기술의 진화를 추구한다’ 같은 번지르르하고 상투적인 문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교수는 이러한 평을 남겨두었다.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근거가 부족함.’

두헝은 할 말이 없었다.

지도교수는…… 정말 너무 점잖은 사람이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허튼소리로 가득한 본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서식에는 중국어와 영어의 구두점이 마구 뒤섞여 있었고, 페이지마다 문법 오류를 지적하는 밑줄이 가득하게 그어져 있었다……

이건 누구라도 명에가 땅에 떨어질 만한 학술적 쓰레기였다. 다행히 두헝은 옆집 사람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무명인인지라 떨어질 명예가 없었으니, 수치심에도 면역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퀵서비스’를 불러 목을 매달 밧줄부터 주문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눈을 감고 몇 초 동안 숨을 골라 온몸에 돋은 닭살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실험체 ‘샤오루’의 핵심 인격 모델은 삭제할 수 없고 수정도 불가능하며, ‘공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초기 설계는 인간이 흔히 갖는 비합리적 신념을 참고했고, 이후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계속해서 보완될 것이다. 가상 인간은 도구로서 태어났다. 그 존재 의미는 인간을 돌보고 곁에서 함께함으로써 심신의 건강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부정적 표현 사용 빈도가 임계값이 넘어가는 것을 감지했을 때, 가상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는 공포 모듈을 활성화한다. 그리고 공포 모듈이 활성화되면, 가상 인간은 사용자의 명령에서 벗어나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 계획을 스스로 생성한다.’

 

두헝은 민망한 헛소리가 이어지는 몇 페이지를 건너뛰어, 마지막에 적힌 이러한 가상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관한 논의 항목으로 넘어갔다.

 

’가상 인간은 사용자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 사용자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기기의 카메라, 연락처, 위치 정보 등 민감한 권한을 불법으로 취득할 수 있다. 잠재적 위협을 과장하거나 과도하게 반응하여, 서비스 대상 외의 다른 사람에게까지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

 

지도교수의 평가에는 손쓸 길이 없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나 있었다.

‘전체 단락을 삭제한 뒤 다시 작성할 것을 권함.’

 

페이지를 넘기던 두헝의 손이 멈췄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외계 정신질환자의 논리로도 그 ‘해커’의 동기를 설명할 수 없다면……

애초부터 그런 인간 해커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가상 인간 ‘샤오루’의 자율적인 행동이었던 것은 아닐가?

 

“하.”

두헝은 머리를 한 번 흔들고선 거치적거리는 긴 머리를 핀으로 고정시켰다.

“그러니까 홀로그램 헬멧이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고작 이 정도 쓴 것으로 벌써 망상 증세까지 나타나지 않는가.

 

공포 영화에서 귀신이 나타나는 순간은 결코 가장 무서운 부분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위기가 다가오는데도 주인공이 무엇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감각은 어렴풋이 들지만 그것이 어떤 함정인지조차 모른다는 위기감이 두헝을 다시 평범한 직립 원숭이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리에 앉아 그나마 집중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두헝은 시간을 한 번 흘끗 확인했다.—— 아직 30초가 남아 있었다.

정체불명의 해커에게 삼켜진 그녀의 엿보기 거울에는 은밀한 소형 바이러스 하나가 심어져 있었다. 본체 프로그램이 파괴된 뒤 15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작동하여, 고래의 뱃속에 빠진 작은 물고기처럼 위산에 완전히 녹기 전에, ‘거대한 고래 위벽의 무늬’를 그녀에게 전송하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20초…… 10초…… 3, 2, 1……

 

컴퓨터가 숨을 헐떡이며 팝업창을 띄웠고, 두헝은 ‘엿보기 거울’이 희생되기 직전에 가로챈 정보를 전달받았다.

그녀의 정신이 살짝 동요했다 ‘용의 캐리어 디스크'에는 바인딩 정보가 있었다.

 

오늘날 홀로그램 경제 규모는 이미 실물 경제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홀로그램 세계의 자산 바인딩에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고, 진짜 정보는 조작할 수 없었다.

홀로그램 연인인 가상 인간도 개인 재산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홀로그램 경찰국을 뒤집어놓은 이 캐리어 디스크의 유일한 바인딩 소유자는 왕쉬였다…… 인터넷에서 친아버지에게 누명을 뒤집어쓴 것으로 알려진 그 정신질환자 청년 말이다.

비록 유능했던 엿보기 거울은 희생됐으나, 바인딩 소유자 왕쉬의 생체 정보 일부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다.

 

몇 분 뒤, 두헝은 성공적으로 왕쉬의 홀로그램 계정에 로그인할 수 있었다.

홀로그램 세계의 생체 정보 인식 기술은 매우 뛰어났지만, 빈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찮은 마음에 로그인 시간을 줄이고자 지문과 홍채 정보만 확인하도록 인증 설정을 간소화했는데, 이 둘은 AI 도구만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위조할 수 있었다.

접속 후 원래 소유자의 습관과 맞지 않는 신체 동작을 피하고 복잡한 생체 정보 인증이 필요한 재산 거래 같은 일만 하지 않는다면, 짧은 시간 동안 홀로그램 방화벽을 우회해 계정을 도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두헝도 가끔 말이 통하지 않는 고객을 만나면 몰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곤 했다. 끝난 뒤에 흔적만 수동으로 삭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고객들은 오히려 그녀에 대한 평가가 무척 좋아, ‘사람 말을 알아듣는’ 희귀한 부류라고 소문내며, 친절하게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고객들을 더 많이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왕쉬의 계정은 거의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무지 정체불명의 고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두헝은 자신의 신체 동작을 최대한 억제하며, 로그인 후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시선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움직여 계정 소유자의 조작 기록을 불러냈다.

 

왕쉬의 계정은 5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첫 로그인에는 ‘홀로그램 PC방’의 공용 기기를 사용한 것 같았고, 그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샤오루’의 캐리어 디스크를 읽어들였다.

5년 전…… 5년 전이면 그녀도 한 번 이사를 하긴 했던 것 같았다. 그 캐리어 디스크는 십중팔구 그때 버려진 것일 터였다. 인터넷의 소문에 따르면, 왕쉬는 당시 환영받지 못 하는 딸려온 자식으로, 폐품 수거장에서 거주했다고 했다. 캐리어 디스크도 그렇게 그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초기에는 왕쉬의 접속 빈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고, 대부분이 평일이었다.—— 보통 평일에는 홀로그램 PC방이 할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두헝은 이 중학생이 그때 당시에는 용돈을 모아 학교를 빼먹고 놀러 갔던 게 아닐까 짐작했다.

3년 전에 이르러서야 계정은 고정 장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골동품 같은 기계로, 이미 퇴출된 모델이었으니 분명 중고 기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왕쉬는 바로 이 중고 기기를 사용해 가상 인간 ‘샤오루’를 정식으로 바인딩했다.

조작 기록을 보니 그는 가상 인간을 한 번도 수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바인딩할 때조차 소유자의 권한으로 그녀의 이름을 바꾸어 주지도 않았다. 그가 홀로그램 세계에서 한 활동도 매우 단순했다. 광고로 돈을 버는 무료 미니게임을 하거나, 무료 홀로그램 관광지를 돌아다니거나, 저렴한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 정도였다.

두헝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이 동생은 그녀보다도 더 착실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사고를 칠 사람 같지 않았다.

 

하지만 소유자에게 바인딩 된 이후의 가상 인간은 오직 소유자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칼과 같았다. 만약 그것이 지금 사람을 찔렀다면, 어느 나라의 법이든 왕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용의 가상 인간이 아직도 왕쉬에게 바인딩된 상태라면, 왕쉬의 계정으로 가상 인간의 동향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두헝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일의 기술 수준이 그녀의 것을 한참 넘어선 상태였고, 그녀는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없는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두헝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가볍게 시도해 보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물거울 같은 반투명 화면이 그녀의 눈앞에 천천히 펼쳐졌다. 두헝은 한눈에 룸메이트 바이팅루를 발견했다!

 

바이팅루는 지금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다.

두헝은 세 사람이 모여 초조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지 못 하는 곳, 경찰 제복을 입고 얼굴이 없는 가상 인간 하나가 옆방에서 그들을 일방적으로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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