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향기
2026. 6. 16.

그러나 위지량은 내놓을 수 없었다.

 

독두(禿頭)*가 집으로 돌아오자, 공소견—이제는 위지령칙(尉遲令則)이라 불러야 했다—이 그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위지량은 정신이 몽롱하여 집중하지 못 한 채 물었다.

“그날 동궁 위랑들을 처리할 때 찰삼청 곁에 있었지? 그자는 죽었느냐?”

*대머리.

 

위지령칙의 얼굴은 검붉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량은 평복으로 갈아입고선, 팔을 들어 위지령칙의 뺨을 내려쳤다. 대머리는 원래도 덩치가 장대한 사대였기에, 위지령칙은 그 한 대에 제대로 서 있지 못 하고 휘청일 뻔하였다.

 

“네게 예절을 가르쳐 준 것이 고작 어제다.”

위지량은 소맷자락을 정리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내 아들이 되었으면 이렇게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몇 번을 더 맞아야 기억하겠느냐?”

 

위지령칙이 비굴함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석 달 동안 위지량에게 뺨을 몇 대나 맞았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때문에 그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코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야.”

 

“죄송하다고,”

위지량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똑바로 서라.”

 

위지령칙은 눈을 감았다가 뜬 뒤, 위지량을 마주 보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얼굴에 또 한 번 우렁찬 따귀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대비하고 있었기에 몸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위지량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눈물도 흘려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대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죄송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쓸모 있는 대답을 해야지.”

위지량이 위지령칙의 뒤통수를 툭툭 두드렸다.

“소견아, 소견아. 대체 언제쯤 머리가 좀 트이겠느냐? 아야가 너를 그 썩은 고깃덩이들 사이에서 끌어내 성과 이름도 바꾸어 주고, 천한 신분에서 빼내 호적에 올려준 것은, 네가 벌모환수(伐毛換髓)*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명(明)·매정조(梅鼎祚)의 《곤륜노(崑崙奴)》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비유.

 

“아들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위지령칙이 대답했다.

“아들은 평생 아야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잊지 않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위지량은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듯 위지령칙을 내리누르며 이야기했다.

“이 구도에서는 은혜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내가 한 마디를 물으면 그 뒤에 숨은 뜻까지 헤아려야지. 그렇지 못 하면 네가 밖에 나가 삼라귀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결국은 평생 남의 뒤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비굴하게 굽실거리고, 꼬리를 흔들며 아첨하게 될 뿐이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백주 대낮 동안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 한 진심이었다.

 

“역노였을 적에는 아무도 너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고 하였지. 소견아,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남의 노비가 되는 순간, 천하에서 가장 천하고 더러운 진흙이 되어 누구나 한 번쯤은 너를 밟고 지나가게 돼. 계급 하나 올라가면 끝날 것 같으냐? 잡호와 천민 위에는 군호(軍戶)*와 전객(佃客)**이 있고, 그 위에는 염호(鹽戶)***와 농가가 있으며, 그 위에는 또 호상(豪商)****과 거상이 있다.”
위지량은 손에 힘을 주어 위지령칙을 단단히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마침내 네가 한문(寒門)과 서민에 이른다 해도, 고개를 들어 보면 그 위에는 또 셀 수도 없고 다 헤아릴 수도 없는 문벌 사족(士族)*****들이 있다!”

*중국 고대부터 대대로 군에 종사하고 군관 역할을 해온 가구.

**소작농.

***제염업자.

****큰 규모로 장사하는 상인또는 돈이 많은 상인.

*****선비나 무인(武人) 집안또는  자손. 귀족.

 

“기어올라야 한다, 소견아. 네가 너무 느리게 오르면 그 역노들과 위랑들이 네 앞날이 되는 것이다. 윗사람은 말 한 마디만으로도 네 삶을 죽음으로 바꿀 수 있다. 신에게 비는 게 무슨 소용이느냐? 은혜를 입는 것은 또 무슨 소용이고? 네가 그날처럼 그렇게 엉엉 운다 한들, 마음이 물러지는 것은 이 아야뿐이다.”

 

위지량은 위지령칙의 얼굴을 받쳐 들고, 매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울지 마라.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눈물은 네 무기가 되어야 한다. 소견아, 령칙아, 아야가 너무 모질다고 원망하지 말거라. 이 세상이 사람을 잡아먹으니, 내가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네가 훗날 어찌 처신하겠느냐?”

 

위지령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위지량이 자신의 눈물을 닦아 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되었다. 가서 환복하고 단정히 차려입어라.”

위지량이 그를 놓아주며 말했다.

“아야가 너를 데리고 사람을 만나러 갈 것이다.”

 

위지령칙은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며칠만 두면 나을 터이니 얼굴에 남은 손자국에는 약도 바르지 않았다. 그는 위지량을 따라 우차(牛車)*에 올랐다. 마음이 조마조마해 안절부절 못 하면서도, 그동안 예절을 잘 배워 둔 덕에 위지량 앞에서 단정히 꿇어앉아 함부로 둘러보지도 묻지도 않을 수 있었다.

*소가 끄는 수레.

 

수레가 길목으로 들어서자, 휘장 밖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떠들석하였다. 겹겹 쌓인 비단 그림자 너머로 주루(酒樓)*와 공방의 깃발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술집.

 

“이곳이 구도의 우면(雨眠) 대가(大街)*다.”

미안함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위지량은 위지령칙을 위해 몸을 숙여 휘장을 걷어 주었다.

“보거라. 이곳에서부터 불빛이 켜진 모든 곳이 전부 우면의 천하다. 밖에서 구도를 찾는 사람 열에 여덟아홉은 우면의 번화함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

*큰길. 대로.

 

위지령칙은 눈부신 야경에 넋을 잃었다. 잠시 뒤 그는 제법 분별 있게 질문했다.

“아야, 이곳은 어찌하여 우면이라고 부릅니까?”

 

“이곳의 큰 주인이 이런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범인이 이곳에 들면 선진(仙塵)*을 걷는 듯하고, 신선이 이곳에 들면 비에 취한 듯 잠드는구나.’”

위지량이 웃으며 말했다.

“천신이라도 이곳에 오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취한 듯 넋을 잃는다는 뜻이지.”

*선계와 속세.

 

위지령칙이 다소 얼빠진 표정을 짓자, 위지량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때마침 우차가 목적지에 도착해 그는 위지령칙을 데리고 수레에서 내렸다. 위지량은 주루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시중들던 동복(僮僕)*에게 질문하였다.

“귀빈은 도착하셨느냐?”

*사내아이 종.

 

동복은 유리 치자등(梔子燈)* 아래에서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귀빈께서는 한참 전에 오셨습니다.”

*송대에 등장한 조명 시설로, 치자 열매를 모방한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붉은 천이 칠해져 있다.

 

위지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복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중정(中庭)을 지난 곳에 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위지량은 복도에서 신을 벗으며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야, 이곳은 마음에 드십니까?”

 

그가 오늘 밤 연회를 열어 초대한 귀한 손님은 다름 아닌 미진이었다.

 

용산은 평복 차림으로 문 앞에 꿇어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처럼 심의를 입은 미진이 내실 한편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소리를 듣고는 살짝 돌아보았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군. 장군께서는 늘 구도에 계셔서 그런지 저력이 대단하십니다. 바로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시다니.”

 

“아이고, 저도 겨우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위지량은 문가에 이르르자 위지령칙을 데리고 예의 바르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소신이 전하와 후야를 뵙습니다.”

미진의 상석에 복성왕 육관걸이 앉아 있었다.

 

한 손에 데운 타락을 들고 있던 육관걸은 위지량이 크게 예를 올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어나게. 전각에서 예를 차리는 것은 그렇다 쳐도,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이리 딱딱하게 굴 셈이오? 위지량, 계속 이러면 나는 그냥 가 버릴 거요.”

 

위지량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오늘 밤 소신이 감히 연회를 연 것은 첫째로 전하의 행차를 맞아 대접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후야께 사죄드리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너무 무겁군요.”

미진이 데운 타락의 뚜껑을 열고 옅게 웃으며 말하였다.

“작위도 삭탈(削奪)*되고 봉록도 받지 않는 폐인에게 장군의 죄를 따질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던 .

 

“후야께서는 명왕의 혈육이시고 지존의 총애 또한 두터우신데, 어찌 스스로를 ‘폐인’이라 칭하십니까?”

위지량은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더구나 소신이 듣기를, ‘새는 날개가 같은 것끼리 모여 살고,짐승은 발이 같은 것끼리 함께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후야께서는 멀리 아우성에 계시면서도 전하와 뜻이 서로 맞으시니, 이는 필히 현자와 군자가 서로 뜻을 같이하여 친하기 지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국책(戰國策)》에서 인용. 람도 성향이나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뜻.

 

그는 말재주가 좋아, 이 숙질(叔侄)*이 손을 잡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일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뜻이 맞는다’는 말 하나로 화해를 바라는 마음을 모두 드러내었다.

*숙부와 조카.

 

미진은 위지량이 용서를 구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말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저 대머리가 가진 것을 모조리 내놓아도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지량이 전각을 나온 지 고작 몇 시진만에 이렇게까지 치욕을 참는 모습을 보이자, 이번에는 미진조차 그를 괄목상대하였다.

 

“그가 사죄하겠다고 하니,”

육관걸이 미진을 바라보았다.

“나가, 너도 그를 조금은 헤아려 주거라.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지 않겠느냐.”

 

그 말은 위지량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늘 위지량을 죽이지 못 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와 얽혀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위지 장군의 입장이야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지요. 허나 장군께서도 지존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타락을 마시며 말하는 미진의 눈가에는 조금의 포악함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사죄란 본디 사람의 진심을 보는 법인데, 장군께서 제가 원한 그 ‘진심’을 가져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위지량은 잠시 침묵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견아, 앞으로 나오너라.”

 

“말했을 텐데.”

미진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찰작이라고.”

 

“소견아, 두려워 마라.”

위지량은 몸을 낮추어 차근차근 타이르듯 말했다.

“그날 찰작이 궁문 안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후야께 말씀드려라.”

 

위지령칙은 미진의 시선을 받자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는 허둥지둥 머리를 조아린 뒤,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날…… 궁문이 닫혔습니다. 저는 찰 형제가…… 그가…… 그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걸 지켜봤습니다…… 장도 몇 자루가 그의 배를 찔렀습니다…… 그가 땅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뒤에서 다시 심장을 꿰뚫렸습니다……”

 

“소신이 후야의 신임을 저버렸습니다.”

위지량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곧바로 위지령칙의 말을 받아 이어나갔다.

“후야께서 이 두 호위병을 신에게 맡기셨으니, 소신은 본디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허나 지존의 조서가 너무 빨리 내려져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소신은 온 힘을 다해 소견만이라도 엄중한 포위 속에서 구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찰……”

 

데운 타락이 바닥에 내던져져 산산조각이 났다. 위지량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옷깃이 거칠게 붙들린 채 들어올려졌다.—— 정말로 들어올려진 것이었다. 미진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위지량은 살며시 미진의 손목을 잡으며 이 궁지에 몰린 짐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라의 아들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는 오늘 찰작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는 미진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그 안에 담긴 고통이 미진의 가슴속에서 밖으로 넘쳐나와, 미라를 꼭 닮은 두 눈동자에 번져 올라왔다.

 

찰작이 왜 죽었겠는가?

 

너 때문이지. 위지량은 미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겉보기엔 두려움에 떠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두 눈은 미진에게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네가 쓸모없는 놈이기 때문이야.

 

네가 누굴 탓하는 거지? 동궁 요패 하나로 그의 목숨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미진, 너는 참 쓸모없는 놈이다. 아비를 죽여 영예를 구하고, 천하에서 가장 대단한 성씨를 가졌으면 뭐 하느냐? 고작 천성부 병사 하나도 지켜 내지 못 하는 주제에. 네 꼴을 봐라, 한 번 보란 말이다!

 

위지량은 거의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찢어 놓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은 사죄인 동시에 복수이기도 했다. 저들이 감히 자기 머리를 밟고 수를 벌였으니, 그 또한 감히 미진의 심장을 후벼 팔 것이다. 무엇이 또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통쾌하겠는가!

 

“후야의 말씀은, 소신이……”

 

위지량의 상반신이 홱 뒤집혀 나가떨어졌다. 미진이 때린 것이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아찔해져 머리를 흔들면서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구도이다! 바깥의 동복과 시종들이 모두 비명을 질렀고, 미진은 그를 붙잡아 다시 한 번 주먹을 내질렀다!

 

옆에 놓여 있던 꽃병이 쓰러졌다. 위지령칙은 당황하여 위지량을 감싸려 했지만 미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진은 계속 주먹을 내리꽂았고, 위지량의 콧등이 부러졌다. 그의 입과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위지량이 발버둥 치며 외쳤다.

“후, 후야!”

 

“나가(那伽)!”

육관걸이 곧장 달려와 말리며 용산에게 소리쳤다.

“어서 네 주상을 말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미진은 위지량을 죽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위지량을 죽이고 싶었다! 분노가 온몸을 불태울 듯하였고, 그의 두 손에 피가 가득했다.

 

부러진 이를 뱉어 내던 위지량에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무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미진의 목덜미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칙산을 떠올리고, 미리난을 떠올렸다. 그러나 미진은 다시금 그를 붙들어 바닥에 내던졌고 뺨이 일그러졌다. 위지량은 손과 발을 다 써 가며 앞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발작, 발작이다——”

 

미진이 분풀이 하는 것을 두고 보려 했던 용산 역시 사린(蛇鱗)* 무늬를 보고 당황해 무릎으로 기어가 미진의 팔을 붙잡았다.

“후야, 후야! 노여워 마십시오……”

*뱀 비늘.

 

미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반쯤 구부린 그의 두 눈은 거진 이성을 잃은 듯해 보였다. 얼굴이 따끔거렸다. 위지량의 피가 튄 탓일 것이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격노 속에서 위지량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상이 굴러가고, 타락이 들어 있던 깨진 그릇 조각들이 무릎 아래에 깔렸다. 그는 강렬한 증오를 느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했다. 이토록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지량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쓸모없는 놈이었다.

 

용산은 미진의 소맷자락 안에 있던 경식을 끄집어내 미진의 몸에 감아 주었다. 천주가 눈알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순식간에 유리 화주(火珠)*에 불이 붙은 듯 빛이 났다. 용산은 경식을 잡아당기며 위지량을 세게 걷어찼다.

“어서 꺼지거라! 죽고 싶은 게냐?!”

*빛을 모아 불을 붙일 수 있는 투명한 구슬.

 

위지령칙이 위지량을 끌어냈다. 육관걸도 두 걸음 물러나 주위를 둘러보며 명령했다.

“안을 정리하라. 사람을 남겨 두지 말고, 방문을 닫아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여봐라, 사람을 보내……”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오늘 밤의 연회는 본래 규정을 위반한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삭월도 아니다. 미진이 이렇게 발작하는 일이 미리난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육관걸은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결과를 떠올렸다.

 

오늘 밤 미진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미리난이 묵인했기 때문이었다. 지존은 미진과 위지량이 악수하고 화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재자로 온 육관걸은 절대로 이들이 다시 싸우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나중에 책임을 묻게 되면 숙부인 자신이 제대로 중재하지 못 했다는 말밖에 안 되지 않겠는가!

 

“아무도 부르지 마라. 대문을 지키고 그 누무도 후야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 하게 해라.”

육관걸은 사람들을 훑어보며 덧붙였다.

“후야와 위지 장군께서는 오늘 밤 술을 마시다 장난을 치신 것이다. 너희가 잘 모시면 큰 상을 내리겠다. 허나 내일 아침, 내 귀에 밖에서 헛소문을 떠들어대는 것이 들려와서는 안 될 것이다!”

 

동복들이 엎드려 대답하였다.

 

“용산, 함께 네 주상을 안으로 들이자꾸나.”

육관걸은 말을 마치고 위지량을 바라보았다.

“후야께서는 오늘 밤 술에 취하셨고, 너 역시 술에 취한 것이다! 어서 물러가지 않고 뭐 하느냐. 내일 아침 지존께 어떻게 아뢸지 잘 생각해 두어라!”

 

위지량은 또 한 번 부러진 이를 뱉어 냈다. 그는 이미 사람 꼴이 아니었고, 위지령칙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

 

육관걸과 용산은 힘을 합쳐 미진을 안쪽 방으로 들여보냈다. 얼굴에 튄 피 몇 방울 때문에 인문(鱗紋)*이 드문드문 떠올라 있었다. 그는 경식을 움켜쥔 채 황금화를 하나씩 방석 위에 떨어뜨렸다.

*비늘무늬.

 

“나가,”

육관걸이 미진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네 어머니의 경식을 잘 들고 있거라. 숙부가 한 마디만 하마.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친다. 어서 화를 가라앉히거라!”

 

그들은 오래 머물 수 없었거니와 감히 오래 머물지도 못 하였다. 미씨가 발작하면, 성정이 뒤흔들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되는대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두는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미진은 몸을 반쯤 숙인 채 두 손으로 경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어찌 이 경식 하나로 충분하겠는가? 그가 발작할 적이면, 어머니는 수많은 유리 화주를 그의 몸에 감아 주곤 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언제나 이렇게 바닥에 엎드려 어머니가 불러주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때의 미진은 무수한 황금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천주가 손가락 사이에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었고, 향령원의 바람에는 마른 풀 냄새가 실려 왔다. 미라는 연못의 건너편에서 수고(手鼓)*나 목하금을 연주하며 그를 물속으로 이끌곤 하였다.

*(위구르 등 소수 민족의) 탬버린을 닮은 타악기.

 

미진은 찰작을 떠올렸다. 예전에 그를 달래 주었던 것은 저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찰작이 필요했다. 찰작에게 닿으면 물결 같은 평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그가 찰작을 끌어안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찰작이 어디에서 왔는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날 밤, 궁실에서 찰작을 눌러 넘어뜨렸기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찰작이 그의 뺨을 두드렸을 때, 그는 피비린내 뒤에 숨어 있던 한 점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향기가 의식을 붙들어 주었고, 그를 혼돈 속에서 인간 세상으로 되돌려 놓았다.

 

찰삼청은 미진의 귓가에 다가와 그를 미무야*라고 물렀다. 미진은 바로 그 미무야라는 한 마디 때문에 찰작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찰작이 말한 발음은 모두 '사(邪)'.

 

경식이 가볍게 울리며 황금화가 누군가의 손에 받쳐졌다.

 

“미무야.”

그 목소리가 다시금 미진의 귓가에 다가와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생각하고 있었어?”

 

미진이 고개를 홱 돌리자, 경식이 함께 흔들렸다. 안개를 머금고 비를 품은 듯한 찰작의 두 눈이 눈앞에 있었다. 삼청은 천주 하나를 밀어 미진의 인문 위에 눌러 놓았다. 천주를 사이에 둔 채, 희고 가는 손끝이 그 아득하고 흐릿한 향기를 다시 그의 곁에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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