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도륙
2026. 6. 12.

서도순은 미진을 이끌고 장포를 갈아입혔다. 그는 이번에는 눈치를 길러, 태자를 위해 준비한 관복에서 장식을 줄이고 여러 종실(宗室)*과 비슷하게 맞추었다. 그리고 태자가 몸에 걸치게 하지 않고, 보갑, 여두반낭과 함께 쟁반 위에 받쳐 올리도록 하였다.

*임금의 친족.

 

“태자께서는 이번에 수급(首級)*을 바치고 귀부하시는 것이니, 복장을 융숭히 해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서도순은 쟁반을 미진에게 받쳐 올리며, 드물게도 조금 진심을 드러냈다.

“……이제 만사가 정해졌으니, 태자께서는 지존 앞에서 부디 위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

 

쟁반을 받아 든 미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서도순은 스스로 할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숙이고 미진을 이끈 채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잘 통하는 전내(殿內)*는 하늘이 어두워서인지 다소 캄캄하였다. 시인들은 모두 저마다 절을 하거나 선 채로 도자기 조각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나아간 서도순은 안쪽에 이르러 몸을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노(奴)** 서도순, 지존의 명을 받들어 아우성 태자 미진을 맞아 뵈러 오게 하였습니다. 태자 미진은 관과 신을 벗고 삼가 보갑을 받들어 존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각의 내부.
**저. 자신을 낮춰 부르는 호칭.

미진은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 기다렸다.

전각 안은 한동안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서도순과 여러 시인들이 모두 사라진 듯하여, 오직 문가의 가랑비 소리만이 사락사락 울려퍼졌다. 한참 뒤, 위쪽에서 늙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무야, 네 보갑을 이리 올려라.”

 

미진은 몸을 일으켜 쟁반을 받쳐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미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어두컴컴한 안쪽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도륙왕은 이제로 예순일곱이었다. 금박산(金博山)*이 장식된 통천관(通天冠)** 아래로 깊은 눈 한 쌍이 드러났다. 음산한 궁전 속, 그는 등 뒤에서 흉포한 이빨을 드러낸 흑려 병풍과 한 몸이 된 듯하였다. 옥좌 위에 도사린 그의 도포 선의(禪衣)*** 소매는 두 팔 사이에 겹겹이 쌓여 있었고, 안에 덧입은 심의(深衣)****는 죄 검은빛이었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천자를 상징하는 패환(佩環)*****이 함께 은은한 소리를 울렸다. 그는 그 안에서 아들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듯, 세세하고 느긋한 시선으로 훑으며 미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중국의 한대에서 남북조시대에 사용되었던 전통 장식품.

**고대 중국의 황제가 강사포(붉은색 조복)를 입을 때 착용하던 관모.

***선승(禪僧)이 입는 옷.

****예전에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대개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

*****옥(玉)으로 만든 고리. 

 

미진은 다시금 땅에 무릎을 꿇고 쟁반을 바쳤다.

 

미리난이 말했다.

“어느 것이 네 아야냐.”

 

미진은 손을 들어 가운데 놓인 보갑을 열었다. 두 눈을 굳게 감은 미라의 머리가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미리난이 몸을 숙여 다가온 탓에 패환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두 손을 뻗어 허공을 스치듯 미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미라와 이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미라는 이미 중년이 되었건만, 이 순간 그의 눈썹과 눈매를 쓰다듬던 미리난은 그가 여전히 스물네 살이라고 느꼈다.

 

“행환(行歡)……”

미리난은 미라의 자를 부르며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는 어찌 이토록 모진 아들이더냐……”

 

미라가 아버지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 아버지는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는 눈을 들어 미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너도……”

미리난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또 하나의 모진 아들이구나. 그가 그리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더니, 너는 이렇게 그의 머리를 베었느냐. 너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짐승 새끼인 것이냐?”

 

“큰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미진은 미리난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미라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종고의 내전이 멈추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진양주(一鎮兩州)는—”

 

미리난은 다른 보갑 하나를 집어 들어 미진의 얼굴에 무겁게 내리쳤다. 보갑이 깨져 열리며, 스승 유야(遊冶)의 머리가 한쪽으로 굴러갔다.

 

전각 안은 더욱 고요해졌다. 서도순은 감히 숨도 크게 내쉬지 못 하였다. 피가 미진의 이마 끝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는 여전히 미리난을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끝마쳤다.

“일진양주는 언제 귀부하고, 무고한 백성들은 언제 평안해지겠습니까? 제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미라를 죽일 수 있는 이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네 주제에 스스로를 영웅으로 칭하느냐. 너란 놈은 말이다,”

미리난이 미진의 두 눈을 가리켰다.

“걸명의 사생아다. 영원히 내 아들과 나란히 설 기회가 있을 줄 아느냐. 네 어미, 그 걸명교의 천한 계집만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미친 사람처럼 달아났겠느냐!”

 

미리난이 갑작스레 쟁반을 밀쳐 내자, 머리와 여두반낭이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큰소리로 말했다.

“그가 군부(君父)를 반역하고 향령원으로 달려가 그 짐승들을 거두겠다 하였기에, 나는 참았다. 그에게 전부 주었다! 그가 왕이 되었는데도, 곁에는 또 온통 걸명교 사람뿐이었다. 몇 해 동안 그는 뉘우침을 모르고 똥오줌도 가리지 못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모두 참았다! 그런데 그가 어찌 되었느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지 않았느냐!”

*싸움에   패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진다는 뜻으로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날  없게 되는 지경에 이름을 이르는 .   고조 유방의 말로서 ≪사기 <고조본기()> 나오는 말이다.

 

미라의 머리가 다리 곁으로 굴러왔다. 미진의 가슴이 오르내렸고, 격노한 미리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어찌 너희 같은 아들이 있단 말이냐. 이리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는 마음 속으로 내게 한 줄기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미행환, 미행환아! 그는 태어났을 적부터 줄곧 내 품 안에 있었다. 묘상(妙商)이 그가 허약하여 아마 만월(滿月)*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였기에, 나는 피를 베어 하늘에 바치고 밤낮으로 금오(金烏)**의 천신에게 기도했다.”

미리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미라의 머리를 바라보며 꼭 그에게 전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가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천신의 주구(走狗)***가 되겠다고. 나중에 그가 병에 걸렸을 때, 나는 또 걸명의 법사를 불러왔다. 대진이 교(教)를 멸한 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말이다. 그래, 바로 나였다. 내가 그를 위해 걸명의 업화를 이어 주었다! 그런데 그 짐승들은, 그들은 내게 어떻게 보답했느냐? 그들은 그에게 거짓말을 속삭이며 순진하게도 이 세상에 도원이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었다!”

*여기서는 출생 후 약 만 한 달을 의미.

***태양의 다른 이름.

***사냥개. 남의 사주를 받고 끄나풀 노릇을 하는 사람.

 

미리난은 단번에 늙어버려, 더는 미라의 머리를 돌아볼 수 없었다. 난세를 일으킨 이 효웅(梟雄)*은 허리가 굽어, 빙궤를 짚고 눈길을 돌려야 했다.
*강하고 야심찬 인물.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인물.

“이 걸명 짐승의 머리를 삭월문(朔月門)에 걸어 오가는 모든 이가 알게 하라. 종고 또한 교를 멸할 것이다.”

서도순이 대답했다. 그는 무릎으로 스승 유야의 머리 앞까지 기어가, 그것을 품에 안고 가져갈 준비를 하였다.

“미무야, 너는 ’군친을 향해 역심(逆心)을 품어서는 아니되니, 역심이 있으면 주벌해야 한다‘*는 말을 아느냐.”
미리난은 발을 들어 저군의 신분을 상징하는 여두반낭을 미진 앞으로 걷어찼다.
“네가 수급을 바치고 귀부하면 나를 미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느냐? 이 짐승 같은 놈아, 네 아야는 내 눈에 그저 이제 막 권술을 농락할 줄 알게 된 애송이에 불과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인용.

 

그가 한 팔을 떨쳐 내자, 소매가 펼쳐졌다. 도륙왕은 옥좌로 돌아가 앉았다.

 

“네가 바친 이 머리 세 개는 각각 향령원의 군왕과 장군, 그리고 재상(宰相)이다.”

미리난이 노쇠한 모습을 보인 것도 한순간뿐이었다. 옥좌에 돌아가자, 그는 다시금 등 뒤의 흑려 병풍과 하나가 되었다. 자태는 침착하였고, 목소리에는 위엄이 있었다.

“짐작건대 이는 분명 네 아야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는 네게 이 머리 세 개를 바치게 하여, 향령원이 더는 종고와 대치할 능력이 없음을 보이려 한 것이겠지.”

 

군왕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을 세우면 되었고, 장군이 없어지면 다시 봉하면 될 일이었다. 또한 재상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역시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함께 궤안 위에 올려진다면, 향령원은 근 십 년 내에 재차 형세를 이루기는 힘들 것이다.

 

“기실 그는 이리 번거롭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네 머리만 바쳤어도 나는 그가 벌인 이십 년의 배반을 용서할 수 있었으니.”

미리난의 표정은 냉혹했다.

“아쉽게도 그는 모든 판돈을 구태여 네 몸에 걸었구나. 그래, 좋다. 나는 네가 이 기대에 답할 수 있는지 보아야겠다. 여봐라, 즉시 조서를 기초(起草)*하라.”

*글의 초안을 잡다.

 

서도순이 전각을 나왔을 때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목극(木屐)*을 신고 유야의 머리를 안은 채, 우산을 들어 줄 사람을 부를 겨를도 없이 황급히 아래로 달려갔다.

*나막신. 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앞뒤에 높은 굽이 있어 비가 오는 날이나 땅이  곳에서 신었다.

 

“아우성 태자 미진은 아비를 시해하고 형을 주살하였으며, 성심으로 수급을 바쳤으니, 실로 큰 공을 세웠다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복심왕(伏心王)으로 올려 성은을 보여야 할 것이나, 그 행실이 잔혹하여 인륜에 어긋나므로 특별히 복심후(伏心侯)로 낮추어 잘못을 문책하겠다. 또한 이를 수행한 이들은 명왕의 옛 부하이거늘, 어찌 깃발을 바꾸고* 주인을 팔아 영화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에 특별히 금위군 당장 위지량에게 금궁(禁宮)**의 양문을 봉쇄하고 이 충효와 의리를 모르는 무리들을 모조리 주륙하게 하노라!”

*《사》에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고 대신하는 것을 비유하거나,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가문을 바꾸는 것을 의미함.

**궁전, 궁궐.

 

위지량은 조서를 받들고선 몸을 일으켜 말했다.

“조서가 내려졌으니, 모든 병사들은 명을 들어라. 즉시 금궁의 양문을 봉쇄하고, 단 한 명의 동궁 위랑도 놓치지 말라!”

 

금궁의 양문이 닫히자, 공소견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는 문짝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장군! 우리 두 사람은 삼라귀입니다!”

 

문짝 뒤에서 패도를 정리하던 위지량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고개를 숙여 네 요패를 보거라. 그 위에 새겨진 것이 ‘박호’더냐, 아니면 ‘흑려’더냐? ‘박호’라면 너희 두 사람은 분명 우리 삼라귀 사람이다. 허나 ‘흑려’라면, 내가 너희를 억울하게 했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찰작은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삼라에 들어왔으니, 다음 향낭을 받아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옷조차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금궁 양문 안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보아하니 태자는 이미 태자가 아닌가보군요.”

찰작은 가볍게 자신의 단도를 누르며, 문 너머의 위지량에게 말했다.

“장군, 당신이 오늘 이토록 서둘러 입을 막으려 하는 것을 보아하니, 태자의 형세가 기운 것을 보고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 다짐한 모양이지요?”

 

“너는 참 좋은 재목인데 아쉽게도 출신이 너무 천하구나.”

위지량이 발걸음을 옮기자, 다시금 그의 군화가 빗속에서 탁탁 소리를 내었다. 모든 것이 처음 만났던 그 날 밤과 같았다.

“네가 이 삼라성 안에 탁태(托胎)*할 수 있었다면, 나는 높든 낮든 네게 비장을 봉해 주었을 것이다. 허나 너는 천성부에서 왔지. 그곳은 멀다. 명부가 보증한다고는 하나, 네가 중간에 섞여 들어온 세작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중생이 모태(母胎)에 몸을 붙이다. 

 

대머리는 가느다란 문틈 사이로, 눈 속의 교활함을 드러냈다.

 

“찰삼청, 네 재능으로 천성부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실로 명주(明珠)가 먼지를 뒤집어쓴 격이다. 다만 태자——아, 아니지, 이제는 복심후라 불러야겠구나. 복심후가 너를 두고 나와 맞서려 하기에, 나도 그를 달래며 기회를 보아 일을 진행하였을 뿐이다. 네가 정녕 총명하였다면 도중에 올바른 길을 골랐을 것이다. 헌데도 너는 굳이 낡은 것을 끌어안고 놓지를 않았으니, 나 또한 네 뜻에 따라 주마.”

 

그가 찰작에게 군량을 주지 않아 동궁을 따라 밥을 먹을 수밖에 없게 한 것은 좋은 한 수였다. 찰작이 눈치가 있어 그날 밤 위랑을 분열시키고 사변을 일으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다면, 위지량도 기꺼이 진정한 삼라귀의 명분을 상으로 주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찰작은 눈치가 없었다.

 

그것 역시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삼라로 돌아오면 위지량에게는 찰작을 손볼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그가 찰작을 대주(隊主)*로 올린 것도 찰작의 움직임을 더욱 잘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어찌 사람이 꾸미는 일이 하늘이 꾸미는 일만 하겠는가. 미리난의 조서가 내려오자, 그는 아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숙위 대장.

 

지금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또 언제 죽이겠는가? 미진은 이제 후작으로 강등되었으니, 위지량은 더더욱 그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다!

 

찰작이 몸을 돌렸다. 통로의 안쪽은 온통 동궁 위랑으로 가득했다. 죽음이 임박하자 더는 다툴 필요가 없어졌다. 반대쪽 궁문 뒤에서 용산의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으나, 그 소리는 빗속에 흩어져 그저 처량함만을 더하였다.

 

“끝났어……”

공소견이 뒤로 물러나며 인파 속에 파묻혔다. 들어 올린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전부…… 주변에 전부 활과 화살뿐이야……”

 

양쪽의 궁문 위에 있는 것은 모두 궁수들이었다. 찰작은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먼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위랑들이 보리 이삭처럼 무더기로 쓰러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땅에서 방패를 주워 들고 공소견과 함께 중간을 향해 달렸다.

 

위랑 팔백 명은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처럼 앞뒤로 뒤집히며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다. 두 차례의 사격이 끝나자, 살아 있는 사람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 했다. 양쪽 벽과 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었고, 시신들이 겹겹이 쌓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바로 이때 궁문이 열렸다. 완전 무장한 삼라귀들이 장도를 뽑고 양쪽 끝에서 밀려 들어왔다. 삽시간에 비명과 울부짖음이 뒤섞였다. 안으로 들어오기 전 패도를 빼앗긴 동궁 위랑들은 삼라귀와 마주한 순간 도살을 기다리는 돼지나 양과 다름는 처지가 되었다.

 

찰작은 사람을 죽였다. 그가 단도를 뽑아내자마자 뒤에서 누군가에게 붙들렸다. 위지량이 이미 대처해 둔 탓에 여러 삼라귀가 함께 찰작을 에워싸 막고 있었다. 장도들은 하나같이 번쩍였다. 찰작은 하나를 베고, 다시 하나를 베었다. 그때 두 다리가 갑자기 쇠사슬에 걸린 탓에, 그는 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칼 하나가 찰작을 내리쳤다. 그는 다른 쪽을 막아 냈으나, 삼라귀들은 가지런히 힘을 주어 찰작을 사람들 쪽으로 끌고 갔다. 공소견이 옆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쇠사슬을 끌어안아 뒤로 잡아당기며 힘껏 외쳤다.

“찰 형제!”

 

찰작은 기어 일어났다. 발밑은 온통 피였다. 그는 어쩌면 다쳤을지도 몰랐으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공소견의 깃고대*를 끌어당기고, 단도를 세차게 한 삼라귀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그 삼라귀는 그의 얼굴 가득 피를 뿜었다. 그는 숨을 헐떡였고, 또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상반신을 붙잡혔다.

*옷깃의 뒷부분.

 

동료가 있다.

 

찰작은 단도를 걸어 잡고, 몸을 돌려 삼라귀의 얼굴을 베어 냈다. 피가 물동이를 엎은 듯 쏟아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 안에 또 동료가 섞여 들어와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찰작을 떠받치며, 찰작의 두 발이 미끄러지는 동시에 그를 들어 올렸다. 찰작은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앞다투어 장도를 그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한 사람이 칼을 뽑더니, 이어 다시 찔러 넣었다.

 

찰작의 목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는 그가 동료를 죽이던 수법이었다. 그들은 지금 똑같은 수법으로 그를 처형하려 했다.

 

그 사람들이 손을 놓자, 찰작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단도를 쥔 채, 팔꿈치를 땅에 기대 버티고 있었다. 피가 그의 옆얼굴을 가득 타고 흘렀다. 그는 숨이 막힌 듯 몇 번 컥컥댔고, 온몸을 떨었다.

 

삼라귀가 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은 자들은 누구 한 명 감히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못 했다. 그들은 한 겹 또 한 겹 원을 이루어 찰작을 둘러쌌다. 찰작이 다시금 기어 일어나려 했을 때, 누군가 칼로 그의 등을 받치고 밀어버렸다!

 

찰작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가 웅덩이처럼 고인 핏물을 씻어냈다. 삼청은 아직도 눈을 뜨고 있었다. 위지량은 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어 그가 죽었음을 확인하였다. 삼라귀는 철수했고, 황금흑려기가 땅을 뒤덮은 시체 위에 떨어졌다. 하늘이 어두워졌으나 비는 여전하였다. 시인 몇 무리가 외발 수레를 밀고 와 시체를 정리했다.

 

찰작은 수레 위로 끌려 올라갔다. 시인들은 시체를 궁 밖으로 운반해, 옛적 시신을 매장하던 곳으로 가져갔다. 황량하기만 한 곳에서 시체를 검시하는 오작(仵作)* 몇 명이 유등(油燈)을 들고 시인들과 함께 시체 더미 속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뒤지고 있었다.

*지방 관아에 속하여 수령이 시체를 임검할 때에 시체를 주워 맞추는 일을 하던 하인.

 

“여기 아주 예쁜 게 하나 있습니다!”

한 시인이 신기한 듯 혀를 차며 등잔으로 찰작의 얼굴을 비추었다.

“궁 안에서도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요……”

 

“잘못 탁생(托生)*한 게지.”

여전히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오작이 한숨을 쉬었다.

“팔백한 사람이다. 돌아가 장군께 수를 잘못 보고하지 말도록.”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감.

 

찰작을 발견한 시인은 고작 열몇 살로, 아직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몹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를 맨 위에 놓아 두지요…… 아, 그래도 내일 아침 일찍 묻어야합니다. 아니면 들개가 와서 물어뜯을 텐데, 그것도 너무 마음 아프잖아요.”

 

그들은 저마다 물건을 조금씩 주워갔다. 여전히 비가 내려 밤이 쌀쌀했다. 그들은 함께 방에 모여 들어가 장물을 나누자며 떠들어댔다.

 

유등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빗방울이 똑똑 떨어져 찰작의 얼굴 위에 닿았고, 그 사이사이 약간의 얼음 조각이 섞여 있었다. 멀리서 등롱 하나가 소리 없이 나부끼며 다가오더니, 찰작의 앞에 이르러 한 사람의 형체를 비추어 냈다.

 

툭.

 

향낭이 찰작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가, 다시 그의 윤곽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람이 몸을 숙여 말했다.

“찰삼청, 임무다.”

 

비가 생기 없고 텅 빈 두 눈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잠시 뒤, 안색이 돌아오는 듯하더니 눈동자가 휙 움직였다. 뒤이어 찰작은 입을 벌리고 다시금 피를 토해 냈다.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며, 가볍게 숨결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로 지저분해진 그 손이 향낭을 세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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