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작은 비스듬히 빙궤에 몸을 기댔다. 그 위에는 푹신한 방석이 깔려 있어 그나마 몸을 편하게 둘 수 있었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안채에 누워 상처를 치료하며 지냈고, 최근 이틀이 되어서야 탕약을 물처럼 들이켜다시피 한 끝에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열린 창문으로 눈발이 흩날려 실내로 들어왔다. 찰작은 고개를 돌려 거위털 같은 눈송이를 향해 가볍게 입김을 불었다. 그의 살구색 직거(直裾)* 위에 차례차례 내려앉은 눈꽃들은 머지 않아 녹을 것 같아 보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 한대에 입었던 소매가 직선적인 전통 의상.
그때 사내가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찰삼청, 약 먹어라!”
“들어오기 전에 먼저 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지.”
찰작은 움직이지 못 하고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찰삼청은 아직 들어와도 된다고 하지 않았는걸.”
“아파서 정신이 몽롱한가 보구나.”
사내는 쟁반 위의 약그릇들을 하나씩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 집도, 이 거리도 다 내 것이다. 내가 큰 자비를 베풀어 널 주워 와 먹이고 재워 주는데, 너도 내게 한 번 허락을 구한 적이 없지 않느냐?”
“당신은 아야잖아. 내가 먹고 마시는 걸 당신이 돌보는 건 당연한 거야.”
찰작은 조용히 약그릇을 세어 보더니 물었다.
“왜 두 그릇이 더 늘었지?”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네가 석 달을 더 누워 있으면 임무는 다 나 혼자 하라고?”
사내는 탁자의 맞은편에 태연하게 앉으며 말했다. 관도 쓰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아, 초췌하면서도 호방한 모습이었다.
“마셔라. 좀 있으면 식었다고 또 투덜댈 것 아니냐.”
찰작은 첫 번째 약그릇을 들고 물었다.
“무슨 임무?”
“그리 조급하게 나갈 생각이냐?”
사내는 연창을 꺼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 삼라성에 있는 한, 나 역시 네 아야다.”
찰작은 첫 번째 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정말이지 쓰디쓴 하루였다.
“네 천성부 병사 신분를 더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상인의 아들이다.”
사내는 담배를 두어 번 빨며 말을 이었다.
“표정이 그게 뭐냐? 네 아야를 우습게 보지 말거라. 내 그냥 상인이 아니라 옛 도성 기내(畿內)*에서 손꼽히는 대호상(豪商)**이다. 창문도 열려 있으니 너도 밖에서 밤낮없이 들려오는 장사꾼들 소리는 들었을 것 아니냐. 사람이든 말이든 물건이든, 원하는 것은 죄다 판다.”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 나간 가까운 행정 구역의 안.
**큰 규모로 장사하는 상인. 또는 돈이 많은 상인.
찰작은 두 번째 그릇에 담긴 약을 마셨다.
“동원의 사국(四國) 칠십이주(七十二州)에는 문벌 호족, 한서(寒庶)* 출신의 거상, 부족의 추수들까지 셀래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구중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대진을 벗어나면 우리도 밖에서는 꽁무니를 사려야 하는 가련한 신세니까.”
사내는 몸이 가려운지 아무렇게나 긁적였다.
“이 신분은 초롱 등을 들고 찾아 다녀도 구하기 어려워. 다 너를 위한 것이다.”
*가난한 서민.
찰작이 말했다.
“그럼 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돼?”
“아야지.”
사내는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을 묻는 것이야? 찰삼청, 벌써 잊었느냐? 임무의 세 번째 규칙. 동료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말 것.”
“나중에 내가 바깥으로 나가면,”
찰작은 세 번째 약을 마시며 말했다.
“남들이 네 아야는 이름이 무엇이냐 묻겠지. 설마 참견 말라고 답하라는 건 아니겠지?”
사내가 크게 웃었다.
“원백성(元伯成)이라고 답해라.”
“당신은 원백성이고,”
찰작은 더는 약을 마시지 못 하겠는지 그릇을 밀어내고 탁자에 엎드렸다.
“나는 찰삼청이라고?”
원백성이 말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우리는 상인이지 호족이나 한문(寒門)*이 아니다. 누가 궁금해하면 네 어머니 성을 따랐다고 해라. 내가 네 어머니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셈 치면 되지 않겠느냐.”
*가난하고 문벌이 없는 집안.
“그럼 우리 어머니는?”
찰작이 물었다.
“이름이 뭔데?”
“찰십삼(十三), 찰연화(蓮花), 찰선혜(仙蕙).”
원백성은 마음대로 고르라는 듯 이름을 여럿 늘어놓았다.
“마음대로 하나 고르거라.”
찰작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삼라의 호적은 이렇게 쉽게 위조할 수 있는 거야?”
“멍청한 녀석.”
원백성이 연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삼라의 호적이 위조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것이야. 육조 상서들은 제쳐 두고, 그 밑의 영사(令史)*와 이원(吏員)**들은 다 한문 출신이다. 문서를 베끼고 호적을 정리해도 일 년 봉록이 비단 쉰 필이 안 돼. 내가 한 번에 백 필을 쥐여 주면, 자식 하나 더 낳고 아내 하나 더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겠느냐?”
*고대에 문서(文書)를 관장하던 관리.
**하급 관리.
“십삼랑이 돈은 만능이라 했는데,”
찰작은 깨달은 듯 말했다.
“이런 이치였구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꼬마 참새야.”
원백성이 코웃음을 쳤다.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하거라. 네가 다시 이 문을 나서게 되면, 거리의 모두가 널 도련님이라 부를 것이다. 백날 내 입으로 떠들어 봐야 그 위세가 실감이 나겠느냐.”
그는 고풍스러운 소매를 움직이며 구름을 마시고 안개를 내뿜었다*.
*吞雲吐霧. 아편을 피우는 모양.
“하지만 잘 기억해 두거라. 세상일이라는 것은, 무릇 이런 것이야. 하늘이 네게 무언가를 준다면, 반드시 네게 몇 배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원백성의 얼굴이 연운 너머로 희미하게 가려졌다.
“예를 들면 너희 난족이 그렇겠구나. 고통이 클수록 칼놀림은 더 빨라지지. 너도 들어 본 적이 있을 거다. 난족이 쇠락한 것은 힘을 얻고자 스스로를 해치고 목숨을 끊은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길게 숨을 내쉬어 연기를 흩뜨렸다.
“아니면 미 씨 일족이 있지. 그들은 뱀으로 변해 힘을 얻지만, 대신 보통 사람보다 훨씬 쉽게 분노에 휩싸인다. ‘미씨 백여 명, 이로부터 마음을 잃고 서로를 해하니’라는 구절을 들어 보지 않았느냐? 그것을 바로 대가라 부른다.”
찰작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내 소생은……”
원백성은 찰작을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속, 그의 눈에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는 그저 이렇게 대답하였다.
“방심하지 말거라. 어쩌면 죽음은 대가의 시작일 뿐일지도 몰라.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네가 얼마나 잘 공부했는지 확인이나 해 보자.”
찰작이 말했다.
“아직 약도 다 안 마셨는데!”
“마시면서 해. 탕약 몇 모금이 네 입까지 틀어막느냐?”
원백성이 연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오늘 아침 위지량이 어전에서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왜 그랬는지 맞혀 보거라.”
“연말 상계이기는 하지만 그는 금중(禁中)* 당장이니 민정(民政)에는 관계가 없을 테고,”
찰작은 약그릇을 집어 들었음에도 한참 동안 마시지 못 하였다.
“당신이 최근 들어 그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으니, 아우성 때문이겠네.”
*궁궐.
“음, 나쁘지 않아.”
원백성이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럼 아우성의 무슨 일 때문일까”
“미진은 작위를 강등당한 지 벌써 석 달이니 그 때문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명왕이야. 하지만 명왕은 이미 죽었는데 위지량이 어떻게 화를 입겠어? 기껏해야 명왕의 물건을 탐낸 거겠지.—— 그 말들 때문이지?”
원백성은 가볍게 혀를 차며 자못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정답이기도 하고, 오답이기도 하구나.”
찰작은 못마땅해하며 물었다.
“어디가 틀렸는데?”
“말들 때문인 건 정답이다. 허나 미진 때문이기도 하지.”
원백성이 말했다.
“미리난은 병을 이유로 격하당한 미진을 장도궁에 유폐시켰다. 지금은 날개를 모조리 잘린 불구나 다름없지. 의식주는 죄다 감시받는 데다가, 심복이던 당장조차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구도(舊都)*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을 것이라 생각한다. 허나 미리난이 정말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써 삼라까지 데려올 이유가 있었겠느냐?”
*예전의 도읍.
“저군 신분도 잃었고, 왕호도 받지 못 했어. 호는 ‘복심(伏心)’이고 자는 ‘무야’야. 자유까지 잃었는데,”
찰작은 약그릇을 내려놓았다.
“죽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이 모욕이지.”
“무엇을 모욕이라 부르느냐?”
원백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난이 그의 성(姓)을 빼앗았느냐? 죄인으로 폄하하기라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이런 상황에서 미진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 바로 저 두 가지다. 네 눈에는 ‘무야’니 ‘복심’이니 하는 게 모욕처럼 보이느냐? 멍청한 놈아, 밖을 좀 보거라. 장작사(将作寺)에 있는 놈들은 죄 기작(伎作)*이며 잡호(雜戶)**들이다. 매일같이 해가 뜨기도 전에 끌려나가 일하고, 먹다 남은 밥을 조금 주워 먹고, 가장 더러운 물을 마시지. 개니 돼지니 하고 불리며 낳은 자식도 호적을 바꿀 수 없어 대대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것을 진짜 모욕이라 부르는 것이야!”
*장인.
**중국 고대(남북조부터 수당 시대까지)의 호적 제도의 호적 유형으로, 관부에 속한 관천민 계층을 가리킴.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방 안을 거닐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무야’가 어쨌다는 게야?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이 드문 줄 알아? 미리난이 그 자(字)를 내려 그를 모욕하려 했다 한들, 그를 ‘무야’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감히 몇이나 되겠느냐? ‘미무야’라고 떠들어대는 것도 결국은 미리난 한 사람이나 겨우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난은 왜,”
찰작은 자기 배를 가리켰다.
“기어코 동궁 위랑들을 다 죽인 거지? 그들이 미라를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나는 오는 길에 미진이 그 사람들 중 절반은 남겨둘 생각이었을 거라고 확신했어. 그가 다시 세력을 일으키려면 수중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원백성이 말한 것들은 찰작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요패를 남겨 둔 유일한 이유였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원래는 미진의 힘을 빌려 위지량과 ‘천천히 신중하게 논의’할 생각이었는데, 들어오자마자 도륙왕이 숨을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미친 자처럼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원백성의 말대로 미진이 찰작을 두고 위지량과 수 싸움을 벌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진이 위지량을 몰아붙여 찰작을 대주로 승진시키지 않았다면, 찰작의 호가 공적은 위지량의 ‘일이 분명치 않다’는 발뺌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위지량은 화근을 철저히 뿌리 뽑으려 하는 자였기에, 자신의 암살 계획을 알고 있는 변수를 절대 남겨 두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미진은 찰작에게 동궁 요패를 내주었다. 위지량을 위협하는 동시에 찰작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 요패가 없었다면, 위지량은 필시 성을 떠나기 전에 구실을 만들어 찰작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 요패는 사실상 미진에게 유일하게 남은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찰작은 말을 마치고도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대머리 녀석은 하늘에서 떨어진 복에 맞아 기절할 지경이었는걸!”
“찰삼청,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느냐. 일에는 길을 하나만 남겨 두면 안 된다.”
연창을 든 원백성은 비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 그래. 너도 두 번째 길은 남겨 두었지. 마지막 목숨 하나 말이다.”
찰작이 말했다.
“원백성,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데, 아들이 애비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냐?”
원백성이 말을 이었다.
“미리난이 동궁 위랑을 죽인 것은 첫째로 배신이 싫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들의 마음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지.”
상처가 다시금 벌어질 것만 같았다. 찰작은 기운 없이 몸을 빙궤에 늘어뜨린 채 눈발이 제 몸을 쓰다듬게 냅두었다.
“날 주워 온 그날 밤에는 이런 말 안 했잖아.”
“그때 내가 반 시진만 더 떠들 것을 그랬구나. 어린 참새 한 마리가 여기서 종알종알 재잘거리게 나뒀으니, 원.”
원백성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세 번째 이유는 나도 추측일 뿐이니 그냥 들어라. 미라가 처음 도망쳤을 때, 미리난은 줄곧 그가 걸명교도의 속삭임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삼라에 들어온 동궁 위랑들을 한 놈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거야. 혹시라도 그들 가운데 또 다른 아수우(阿須憂)가 나타나 미진마저 구슬려 데려갈까 말이다.”
찰작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아수우가 누군데?”
“아우성(阿憂城)의 우(憂)가 누구의 우인 줄 아느냐?”
원백성도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이 아수우는 참 기이한 여인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기니 지금은 그저 그녀가 미진의 어머니이자 미라의 아내였다는 것만 알면 된다.”
찰작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흩날리는 서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미진을 떠올렸다.
목숨 하나를 잃은 것은 찰작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의 잘못이 엮여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지난 석 달 동안 모든 이의 나쁜 점만 떠올릴 수 있었고, 미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리난이 미진을 유폐하기 위해 고른 곳이 하필 장도궁인 것 역시 그곳이 원래 미라의 궁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미리난의 태도인 게지……”
원백성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찰작은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돌연 입을 열었다.
“미진은 어떻게 그 말들이 쓸모 있을 거라고 확신한 거야?”
“낙인이다.”
원백성은 연창을 문 채 자신의 왼쪽 엉덩이를 가리켰다.
“태자의 마구간에서는 말마다 먹는 사료도 다르고, 종류마다 찍는 화인도 달라. 구분이 아주 세밀하지. 내 짐작에 위지량은 말을 빼앗는 것에 급급해 번호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놈 손에 들어간 말들에는 틀림없이 ‘칠백’, ‘팔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을 테니, 오늘 아침 전각에서 장부를 맞춰 보며 벙어리가 황련을 씹은 꼴*이 되었겠지.”
*고충이 있지만 말하지 못하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의미.
위지량이 실제로 말 몇 필을 탐했든, 팔백오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이상 그것은 팔백오 필이었다. 그 중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가 스스로 메워야 했다. 미진이 그들이 말을 빼앗는 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것도, 이 큰 선물을 준비해 위지량에게 안겨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금명석이 몇 필을 가져가든, 마지막에 위지량이 가져가는 것은 ‘팔백’ 필이었다.
“그 말들이 옛 도성에 들어왔을 때,”
찰작이 말했다.
“위지량이 욕심을 참고 그대로 기병조에 넘겼다면, 미진은 말을 헛되이 보내 준 셈이 되는 거 아니야?”
“이게 바로 네가 아직 그보다 한 수 아래인 이유다.”
원백성은 담뱃대를 옮기며 승부욕 가득한 투로 답했다.
“이 바보야, 늘 바깥만 떠돌고 사람과 어울리지를 않으니 아무리 똑똑해도 세상 물정을 모르지 않느냐. 미진이 하늘에 맡기고 도박을 한 줄 알아? 그는 훨씬 많이 준비해 두었다.”
찰작이 드디어 흥미를 보였다.
“복성왕?”
“그래. 복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전장을 누빈 사람이라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 금명석 그 멍청이가 말을 끌고 돌아갔지만, 이는 미라와 관련된 일이니 복성왕은 필히 신중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을 게야. 번호가 틀린 건 단번에 알아챘을 거다.”
찰작이 물었다.
“그런데 왜 석 달이나 지나서야 돌려보낸 거지?”
“미진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미진과 한 번 호흡을 맞춰야 했던 거야.”
원백성은 연창을 툭툭치며 말했다.
“미진은 왜 위지량만 가지고 놀고 금명석은 건드리지 않았을까?”
“아.—— 미끼를 던진 거구나.”
찰작이 웃음기를 띠며 대답했다.
“위지량은 아우성에서 남들을 대신해 미진을 암살하려 했지만, 금명석은 그저 이용당한 바보였어. 하필 그런 바보를 보낸 것 자체가 복성왕의 태도였던 거지. 그는 미진에게 자신은 다투고 싶지 않으며, 아우성의 분란에 끼어들 생각도 없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거야. 미진은 숙부의 뜻을 알아차리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친밀함을 다지려 한 거지. 그래서 이 말들을 보내 복성왕의 노기를 조금이나마 풀어 준 거고.”
“좋다, 좋아! 여기서는 아야가 상으로 석밀(石蜜)* 두 조각을 주마.”
원백성은 요술이라도 부리듯 소매에서 포장된 석밀 두 조각을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복성왕의 노기를 풀어 준 건 부차적인 일이다. 가장 중요한 건 미리난 앞에서 복성왕이 동궁을 업신여겼다는 구실을 없애 주는 거였지. 아까 네가 묻지 않았느냐. 위지량이 욕심을 참았으면 어찌했을 것이냐고. 내가 알려 주마. 미진의 매섭고도 명석한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위지량이 절대 참지 못 하리라는 것을 계산한 게야! 위지량을 잡아 온 것이 누구냐?”
*빙탕(冰糖).
찰작은 석밀을 뜯으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미라.”
“그래. 위지량은 미라에게 잡혀 왔다. 그가 평생 동안 잊지 못 하는 것이 대칙산 전투야.”
원백성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우성에 들어와 일생 가장 두려워하던 적이 시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말들은 동쪽에서 들여온 좋은 말들이었다. 본디 다 곤도인들의 것이었어야 했지. 그가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느냐?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억눌려 있던 한도 죄 그의 탐욕을 부추겼다. 고작 열몇 필즈음 탐내도 큰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찰작은 매운맛을 느끼지 못 했지만 단맛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석밀 몇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그대로 먹을지, 약에 넣을지 고민했다.
“정말 자업자득이네.”
찰작은 다른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답했다.
“미리난은 또 뭐라고 했어?”
“미리난이 모를 것 같으냐? 도륙왕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 모든 것을 다 꿰고 있다.”
원백성이 결론짓듯 말했다.
“오늘 그가 움직인 것은 결국 미진 때문이다. 그 김에 겸사겸사 금위군에게도 주의를 준 것이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익숙한 찰작이 바로 대답했다.
“독충을 기르려 하는 건가?”
미리난에게는 한창 때의 양자 넷이 있었고, 이제는 수완이 맹렬한 손자 하나까지 불러들였다. 손바닥만 한 삼라성에 어찌 그 많은 신선을 다 품을 수 있겠는가. 필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도륙왕도 늙었다. 가장 기대하던 저군마저 죽었으니, 그도 더는 수가 없어 종고를 맡길 알맞은 군주를 찾을 방법을 생갹해야겠지.”
원백성은 담뱃대를 내려놓고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의 임무는 그 저군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다.”
“다 죽이면 피비린내가 너무 심하게 나지 않을까.”
찰작은 석밀을 잘게 씹으며 말했다. 보슬비가 내린 듯 젖은 눈동자에는 언제나 천진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래부터 위까지 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어디 남 걱정할 여유가 있느냐? 우선 네 몸이나 잘 챙겨라.”
원백성은 찰작의 옛 요패를 던져 주었다.
“이름도, 얼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구도를 돌아다닐 때에는 이놈들도, 그 뒤에 숨어 있는 더러운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잘 기억해 둬. 우리가 잠입한 곳이라면 어디든 그 더러운 것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도망칠 길은 하나만 남겨 두면 안 된다. 그리고 명확한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나 말고 다른 밀정을 만나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한 번만 더 확인할게.”
찰작은 단맛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하는 밀정은 우리 편을 가리키는 게 맞아?”
원백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 이 신분은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조직이 십여 년을 공들여 운영하고, 수백 명의 목숨을 희생해 겨우 만든 것이니 나는 중요한 인물이다. 너도 춘작의 난을 겪었으니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 편이라도 고문을 견디지 못 하면 언제든 동료를 팔아넘길 수 있다. 내가 다른 밀정과 너를 만나지 못 하게 하는 것도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찰삼청, 명심해라. 네 정체가 드러나면 나 역시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 그때는 우리 둘이 죽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야. 이 옛 도성에 숨어 있는, 아니 종고 전역에 숨어 있는 밀정들까지 모조리 죽을 수 있어. 그러니 너 자신을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위지량과 서도순은 날 본 적이 있어.”
찰작은 요패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단도가 박히며 생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날 죽이려 했던 그 더러운 것들도.”
“위지량과 서도순이 널 본 건 사실이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장점을 잘 이용해야지. 그리고 널 죽이려 했던 그 더러운 것들 말인데,”
원백성은 몸을 돌려 방문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 도련님께 보여 드려라.”
문이 열리자 바깥에 무릎 꿇고 있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마대 속 물건을 모조리 쏟아냈다. 와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묻은 삼라귀 요패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열다섯 개. 딱 맞는군.”
원백성은 다시 연창을 물며 거들먹거리는 자세를 취했다.
“목은 다 베었느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문가의 사람이 엎드린 채 말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가져왔습니다.”
“앞으로 사람을 죽일 때는 꼭 목을 베어라.”
원백성은 느긋하게 말했다.
“다시는 너 같은 놈이 하나 더 섞여 들어오지 않게.”
찰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짜 아야가 불쑥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미진 말이다. 네 이놈 도대체 그 녀석한테 무슨 미혼탕을 먹였길래 그가 나오자마자 말을 가지고 위지량을 협박하는 것이냐? 원래라면 미진은 상계가 끝날 때까지 이 수를 숨겨 두었어야 했다. 지금 움직여 봤자 위지량을 죽일 수도 없어.—— 내 보기엔 그가 저 대머리에게 사람을 내놓으라 협박하는 것 같은데 이게 어찌된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