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마필(馬匹)
2026. 6. 14.

석 달 뒤, 세설(細雪)*이 자욱하게 떨어졌다.

*조금씩 잘게 내리는 눈.

 

위지량은 막 교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곧장 전각 앞으로 달려가 배알(拜謁)*을 청하였다. 묘시도 되지 않은 시각, 회백색 하늘은 아득하고, 사방이 여전히 잿빛에 물들어 어슴푸레했다. 군화를 신은 그의 발이 바닥을 울리자, 멀리서부터 서도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위가 높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가 뵘.

 

“위지 장군도 오셨군요.”

서도순이 몸을 비키며 말했다.

“오늘 누가 오셨는지 보시지요.”

 

위지량은 이미 며칠 전에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놀란 기색을 지어 보이며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렸다.

“소신, 복성왕 전하를 뵙습니다!”

 

복성왕 육관걸은 관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다. 올해로 마흔아홉이 된 그는 오랜 세월 바깥에서 군을 이끌었음에도 무인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위지량을 보자마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우리 인연도 이리 오래되었는데, 이런 허례허식을 차릴 필요가 있겠는가? 어서 일어나게. 나도 자네를 본 지 꽤 오래되었구만.”

 

위지량은 몸을 일으키고 공손히 대답했다.

“바깥은 전황이 긴박하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번에 도성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 있으신 것이겠지요?”

 

“아이고, 전하, 이것 좀 보십시오.”

서도순이 주미(麈尾)*로 위지량을 가리켰다.

“장군께서는 어찌 이리 총명하십니까! 전하께서 입을 떼시기도 전에 벌써 일을 거의 알아채지 않으셨습니까. 소인은 말이지요, 오로지 위지 장군만을 선모하지 신선도 부럽지 않습니다. 참으로 영민하고 섬세한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말총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먼지떨이.

 

요즘 기분이 좋았던 위지량은 서도순이 부러 어리숙한 척하는 것을 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서 상시께서 또 소신을 놀리시는군요. 소신 같이 조야(粗野)*한 사내에게 무슨 섬세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저 며칠 동안 육조 상서들께서 오가는 것을 보고, 필히 향령원의 귀부가 순탄치 않아 북방 전황이 심상치 않으리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니, 틀림없이 승전보가 온 것이겠지요.”

*물건 따위가 거칠고 막되다.

 

“승전보라 하기에는 과분하네. 동부의 여러 부족이 흩어져 소란을 일으키고 있어. 겨울이라는 형세를 빌려 겨우 도성으로 돌아와 조현(朝見)*할 수 있게 된 것일세.”

전쟁에 있어서 결코 자신에게 공이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육관걸이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귀도는 지존께 전황을 직접 아뢰기 위함이네.”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다.

 

서도순이 말했다.

“올해는 참 길한 해입니다. 우리 종고는 내전도 끝났을 뿐 아니라, 복심후까지 모시게 되었지요. 소인의 얕은 소견으로는, 복심후께서 마음을 바쳐 귀감이 되셨으니, 저 반적의 추수들도 그리 오래 날뛰지는 못할 것입니다.”

 

“복심후 이야기를 하자니,”

육관걸이 다시 위지량을 바라보았다.

“내 명석에게 듣기를, 그 녀석이 경솔하고 어리석게 굴어 아우성에서 자네의 공무를 그만 망칠 뻔했다더군.”

 

위지량은 육관걸이 바로 이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노(老)금 그 사람도 참! 소신은 그가 옛 도성에 있을 적에도 늘 형제들이 함께 공무를 보는 것에 무슨 방해가 어디 있느냐 말하였습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협력한 셈인 것을요. 허나 그 사람은 말이지요, 본디부터 유난히 우직하여 아직까지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여긴 모양입니다. 떠날 때에도 씩씩거리며 계속 자신을 탓하더군요. 이제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소신을 대신하여 잘 달래 주십시오.”

 

그는 입을 다물고 금명석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 위지량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금명석의 공은 모조리 사라지고, 모두 그가 양쪽을 받쳐 가며 수습한 일처럼 느껴졌다.

 

서도순은 그저 곁에서 미소만 지을 뿐, 말을 얹지 않았다.

 

줄곧 진지하게 듣고 있던 육관걸이 마지막에 이르러 고개를 끄덕였다.

“명석은 본부 출신에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어. 지금은 노장이라 불릴 나이가 되었지만 성미는 예전 그대로라네. 자네가 그와 짝을 이루었으니 길에서 손해를 좀 보았겠지만, 자네가 아니면 또 누가 그를 이렇게 관대히 품어주겠나. 허나 안심하게. 내 그 녀석이 돌아오자마자 사람을 시켜 형장 오십 대를 치게 했네. 이번 귀도에 수행하지 못 한 것도 아직 침상에 드러누워 있기 때문일세.”

 

위지량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금명석은 육관걸 휘하의 대장 중 하나였다. 아우성의 일을 입이 닳도록 말한다 하더라도, 형장 오십 대를 맞을 정도는 아니었다. 위지량은 그의 말에서 어렴풋이 안 좋은 예감을 느꼈으나, 육관걸의 표정에는 빈틈이 없어 이 복성왕의 속셈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대머리가 막 입을 열려던 참에, 저편에서 시인이 다가와 전갈을 올렸다. 세 사람은 웃음을 거둔 채, 신분에 따라 신발을 벗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전내에는 몇 기의 청동 촛대가 빼곡하게 서 있었고, 거대한 몸을 감싸고 있는 천장의 청동 흑려 조각이 깨끗하게 닦인 바닥에 비쳐 보였다. 미리난은 병풍 한쪽에 오늘 새로 올린 소매(素梅)*를 두고 왕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청매실, 신매실 혹은 맛을 내지 않은 매실.

**상서성(尙書省)의 부관급 직책으로 좌·우 복야로 나뉘어 있다.

 

“……장부를 작성하고 조사하는 것에 착오가 있었고, 군마 배급에도 부족이 있었습니다. 만일 해가 바뀐 후에도 계속 병사를 움직여야 한다면, 짐작컨대 올해 상계(上計)*가 끝나기를 기다리셔야 할 듯합니다.”

상서좌복야 두미(杜微)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 각지의 계연(計掾)**들이 모두 삼라로 모여들고 있고, 낭관(郎官)***의 선발 역시 지존께서 직접 재가하셔야 합니다.”

*군국(郡國)이 매년 회계 담당 관리를 중앙으로 파견하여 회계 보고를 하는 것을 말함.

**중국 고대 지방 정권의 관리 중 하나로, 상계를 담당했다.

***한대(漢代)의 시랑(侍郎)·낭중(郎中).

 

“자네는 나이를 먹을수록 담이 작아지는군.”

미리난이 소매를 한 번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새벽부터 와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니, 지금 같은 다사다난한 시기에 동부 여러 부족을 상대로 또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말하고 싶은 것이로겠구나.”

 

미리난보다 고작 몇 살 아래인 두미는 수염을 깎지 않고 곱게 기르고 있었다. 그는 미리난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웃으며 대답했다.

“노신이 무슨 꾀를 부리든, 지존의 눈을 벗어나지 못 하는군요.”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만, 내 자네만큼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자네가 하는 말을 짐이 어찌 못 알아채겠나? 전쟁이란 돈과 군량을 크게 소모하는 법이다. 짐이 묘상의 체면을 빌려 나고(那姑)에 화의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의 형편은 몇 배 더 나빴을 것이다.”

미리난은 사소한 것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이제 막 들어온 세 사람에게 손짓하여 예를 생략하라 지시하였다.

“기병 장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래 것들이 꾀를 부린 것이지 자네 탓이 아니다. 마침 잘되었구나. 우리 중 기병을 가장 잘 아는 이가 왔으니, 그와 장부를 맞춰 보거라. 잘못된 점이 있으면 여기서 바로 해결하여라.”

 

그가 말한 ‘기병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육관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몇 사람이 서로 예를 나누었다. 미리난이 재차 입을 열었다.

“관걸은 밤길을 달려왔으니 오느라 고생하였을 것이다. 서도순, 복성왕께 자리를 내드려라.”

 

서도순이 대답했으나 육관걸은 사양했다.

“소신은 그저 말을 달려 알현하러 왔을 뿐입니다. 지존께서 침식(寢食)을 잊고 국사에 열중하여 아침저녁으로 정무를 돌보시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앉으라면 앉거라.”

미리난이 빙궤에 기대며 말했다.

“너는 진외(鎮外)*의 대장군에 호주(豪州) 자사(刺史)**까지 겸하고 있다. 천자를 대신하여 휘하를 다스리는 이가 일 년 중 며칠이나 쉴 수 있겠느냐? 집에 돌아왔는데도 내가 너를 계속 고생시키겠느냐? 어서 앉거라.”

*진(鎮)의 바깥. 변방.

**한()·당() 시대 주()의 장관.

 

육관걸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원래라면 서도순이 데운 타락(駝酪)*을 올려야 했으나, 그는 곁에 선 채 어딘가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소의 백색으로살균하여 음료로 마시며 아이스크림버터치즈 따위의 원료로도 쓴다.

 

“무야.”

미리난이 말했다.

“복성왕께 낙을 올려라.”

 

시선을 돌린 위지량이 줄곧 소매(素梅)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미진을 발견했다. 이렇게 빨리 복심후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그의 눈꺼풀이 또 한 번 꿈틀했다.

 

미진은 예전처럼 높은 관을 쓰고 있었다. 그는 조색(皂色)*의 심의(深衣)를 입었고, 옷깃과 소맷부리의 여문(蜧紋)**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허리에 여두반낭을 달고 있었다. 복심후는 작위를 강등당한 뒤 한 차례 크게 앓았다. 듣기로는 이 몇 달 동안 줄곧 장도궁(長渡宮)에 머물렀다고 하였는데, 그곳은 본디 미라의 궁실이었다.

*곱지 아니한 검은 빛깔.

**여(蜧)의 무늬.

 

자리에서 일어난 미진이 시인에게서 데운 타락을 받아 육관걸의 서안 위에 바쳤다. 그를 바라보는 육관걸의 표정에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둘은 아직 만난 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보는 것도 좋겠구나.”

미진을 한 번 쳐다본 미리난은 더 이상 그 말을 이어 가지 않고 두미를 불렀다.

“응영(應榮), 장부를 맞춘다 하였지? 복성왕께 말씀드려라.”

 

두미가 대답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노신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 일진양주에 더해 향령원의 여러 군까지 귀부했으니, 마필이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허나 며칠 전 병조에서 올린 장부를 보니, 말의 수가 맞지 않았습니다.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팔백오 필이 모자라더군요.”

 

위지량은 재빨리 미진에게 곁눈질하였다. 그러나 미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매(素梅) 곁에 서서 그들이 논의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말에 대해서라면 소신도 알고 있습니다.”

육관걸이 천천히 답했다.

“그 팔백여 필은 본래 아우성에서 노획한 것이었습니다. 헌데 소신이 위지 장군을 보좌하라 보낸 금명석이라는 자가 원체 경솔한지라, 이 말들도 우리 기병에게 포상으로 나누어 줄 대수롭지 않은 전리품이라 착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중 사백 필을 제멋대로 군영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신이 이번에 도성으로 돌아온 것은 지존께 군정을 아뢰는 것뿐 아니라, 그 사백 필을 돌려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지금 말과 그에 맞는 갑주(甲胄)*는 모두 성 밖에 있으니, 지존께서 사람을 보내 점검만 하시면 됩니다. 소신이 휘하를 엄중히 다스리지 못한 탓이니, 금명석에게 형장 오십 대를 내렸습니다.”

*갑옷과 투구를 아울러 이르는 ..

 

위지량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몇 번이고 세어보았다. 아우성의 전마는 애초에 팔백오 필이 아니었다! 그는 오늘을 대비해 금명석과 다투며 일부러 그가 더 많이 가져가도록 하였다. 때문에 마지막에 이르러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은 분명 백오십 필이 전부였다.

 

백오십에 사백을 더한 것이 어찌 팔백오가 된단 말인가?

 

“그가 함부로 결정한 것은 잘못이다. 허나 어찌되었든 전쟁을 위한 것이지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네게 말이 부족하다면 이 사백 필은 상으로 내리겠다. 다만 다음부터는 반드시 응영에게 수를 먼저 명확히 보고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상서좌복야가 이런 하찮은 일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하지 않겠느냐.”

미리난은 팔을 괴며 말했다.

“좋다. 이 사백 필은 이렇게 정리하겠다. 그럼 나머지는 어찌 되었지?”

 

육관걸이 잠시 머뭇거리며 답을 골랐다.

“나머지는… 아마 위지 장군께서 맡고 계실 것입니다.”

 

위지량의 머릿속이 번개처럼 돌아갔다. 그는 감히 누구도 쳐다볼 수 없어 곧장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답했다.

“소신, 비천하고 식견이 짧아 분수를 모르는 천한 놈입니다. 허나 감히 지존의 마필을 탐낼 생각은 없습니다. 아우성 안에 있던 말은 오백오십 필이 전부였습니다. 지금 복성왕 전하께서 가져오신 사백 필을 빼면, 신에게는 백오십 필이 남아 있을 뿐……”

 

“오― 네가 가져간 것이로구나. 위지 장군, 자네 담이 이리 클 줄이야.”

미리난은 몸을 조금 고쳐 앉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몇 번 흘렸다.

“자네 눈에는 우리가 전부 멍청이로 보이나?”

 

전내가 이렇게 서늘하였음에도, 위지량의 이마에는 삽시간에 땀이 맺혔다. 그는 목구멍이 바싹 말라 몇 번이고 침을 삼키며 간신히 답하였다.

“소신, 소신이…”

 

“그대가 무슨 소신인가? 명왕의 말이 삼라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네 주머니로 먼저 들어가는 것을. 내 보기엔 나보다 자네의 더 위세가 대단한 것 같군.”

미리난은 위지량을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에 서린 한기가 뼈를 에는 듯하였다.

“그때는 태자의 작위가 내려가기 전이었을 텐데?”

 

위지량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정세가 어지럽고 성안에도 유구들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태자, 태자께서… 후작께서는 마침 큰 변고를 겪으시고 자객들에게 놀라……”

 

“그가 자객에게 놀랐다고 하여 네가 그의 말을 가져가도 된다는 말이냐.”

미리난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위지량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가 자객에게 놀란다면 너는 또 어떻게 할 셈이냐?”

 

위지량이 대답했다.

“만약 자객이 있다면 소신은 필시 목숨을 걸고 싸워 지존께서 절대로——”

 

미리난은 책상 위의 촛대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위지량을 향해 내던졌다. 불길이 바닥 위로 솟구쳤으나 위지량은 감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주변의 시인들이 즉시 엎드려 절하였다. 서도순이 허둥대며 말했다.

“지존,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노여움을 거두라니,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느냐!”

도륙왕은 격노한 표범 같았다.

“저놈이 행환의 말을 빼앗았다! 미개한 상것! 그때 행환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사흘이었다! 고작 사흘 만에 감히 하극상을 부리느냐? 동곤노(東昆奴) 천한 자식아!”

 

이는 곤도인을 부르는 극심한 멸칭이었다. 위지량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쉼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죄신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돌연 흐느끼기 시작했다.

 

“죄신은 본래 동곤의 비천한 종으로 교화를 받지 못한 몸이었습니다. 허나 명왕께서…… 명왕께서 죄신을 붙잡아 도성으로 데려오셨습니다. 벌써 이십여 년입니다, 지존! 죄신은 한순간도 명왕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명왕 같은 천인(天人)*은 동원 백 년을 통틀어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신은 아우성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하였습니다……”

*선인(仙人) 같이 () 있는 사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저 같은 동곤의 천노(賤奴)*가 어찌 감히 명왕의 유용(遺容)**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지존, 죄신은 말은 고사하고, 아우성의 일초일목(一草一木)***조차 감히 보고 만질 엄두를 내지 못 하였습니다……”

*비천한 노예.

**사후의 용모.

***한 그루의 나무와  포기의 풀이란 뜻으로극히 사소한 사물을 이르는 말.

 

위지량은 진심으로 우는 것 같아 보였다. 몸이 굳어버린 듯한 미리난은 시선을 전각 밖으로 던지고, 단숨에 살심을 거두었다. 저 자는 아들이 전쟁에서 데려온 항장(降將)*으로, 오랜 세월 동안 궁중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몸을 삼가왔다. 이렇게 화를 다스리지 못 하는 것을 보니, 필시 그 자신이 늙어버린 것이 분명하였다.

*항복한 장수.

 

한참 뒤, 미리난은 흥이 식은 듯 손을 내저으며 위지량에게 꺼지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사흘을 주겠다. 남은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병조에 돌려놓아라. 만일 한 필이라도 모자란다면 네 몸으로 메우게 하겠다. 되었다. 피곤하니 모두 물러가거라.”

 

그들이 조용히 물러나자, 넓은 전각이 텅 비어 미리난만이 홀로 남았다. 그는 옥좌에 앉아 바깥의 세설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위지량은 막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뒤따르던 서도순이 입을 가린 채 걱정스러운 듯 나직이 말하였다.

“장군의 그 세심한 마음은 역시 쓸모가 있군요. 보십시오. 이렇게 큰 위기도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갔지 않습니까.”

 

위지량은 서도순이 어찌하여 조금 전 전각 밖에서 복심후의 이야기를 구태여 꺼냈는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처음에는 저 환관이 또 자기를 놀리려는 줄 알았으나, 그것은 뜻밖에도 경고였다.

 

서도순은 미진이 오늘 전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한 마디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으니, 참으로 온 힘을 다했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쩡하다가도,”

위지량은 복성왕이 멀리 걸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멈추고, 서도순을 돌아보며 무언가를 물으려 입을 열었다.

“지존께서 어째서 갑자기 또 미라를……”

 

돌연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서도순은 두 걸음 뒤에 멈춰 서 있었고, 지금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미진이었다.

 

미진은 사람을 압도할 만큼 키가 컸는데, 이렇게 높은 관까지 쓰고 있으니 서 있기만 하여도 묘하게 사람을 짓누르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복심후의 표정은 그다지 엄숙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손을 들어 흩날리는 눈송이를 쓸어냈다.

“오늘은 우리 아야께서 처음 발작을 일으키신 날입니다. 지존께서도 어젯밤 그 일을 떠올리셨겠지요. 장군께서는 괜히 억울한 일을 겪으신 겁니다.”

 

위지량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지존께서 아들을 그리워하시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당연한 정이지요. 저희 같은 하신이 마땅히 헤아려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지존께서 저를 몇 마디 더 꾸짖으셨어도, 그저 마음이 풀리신다면 신은 기꺼이 달게 받았을 것입니다.”

 

“참 충성스럽군.”

미진은 감탄하는 듯 말했다.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은 역시 장군께서 할 때나 남을 신복시킬 수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그 사백오 필은 어떻게 메우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이 짐승 같은 놈이 뒤에서 장난을 친 것이었다!

 

“후야, 함께 도성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저와 수수께끼를 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무슨 팔백오 필이란 말입니까. 동궁 마구간에 있던 말은 전부 합쳐도 오백오십 필 아니었습니까?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위지량은 진심으로 가르침을 청하듯 물었다.

“어찌 석 달 사이에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늘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미진은 게으른 투로 대꾸했다.

“정말 모르겠나?”

 

위지량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돌아가거든 그 말들을 다시 한번 잘 살펴보거라.”

미진은 위지량의 어깨를 반쯤 두드리며 감싸듯 손을 얹으며 말했다.

“비밀은 바로 그 말들에게 있다. 이 몇 달 동안 나도 일이 많아서 깜빡 잊고 네게 말해 주지 못 했구나. 그 말들은 하나같이 좋은 말들이다. 요즈음 좋은 말이 얼마나 귀한지는 잘 알고 있겠지? 혹시라도 부주의하게 몇 필 팔아 버렸다면, 잊지 말고 그것까지 지존께 갚아 바치도록 하거라.”

 

위지량은 이를 갈았다. 말을 전부 가로채지도 못 하였고 백여 필은 금위군에 남겨 두었다. 지금 말이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자라는 몇백 필만으로도 집안을 몽땅 거덜내야 할 판이었다.

 

“좋습니다.”

위지량은 다시 웃음을 띠어 보였다.

“예전에는 제가 위인을 알아보지 못 해 후야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번 교훈은 헛되지 않는군요! 허나 천신께서 보살펴 주신 덕인지 오늘은 제 목이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후야께 사죄할 기회조차 없었겠지요. 후야, 동궁 위랑들을 죽인 것은 결코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후야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지존께서는 두말하지 않으시니, 저는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선 정말로 미진에게 예를 올리며 사죄하려 했다.

 

“그 일은 되었다. 벌써 지난 일이지 않은가.”

미진은 그를 말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대신 그대는 내게 용산을 남겨 주었지.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군. 사죄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보다는 내 요패를 달고 있던 그 삼라귀 두 사람을 넘기거라.”

 

“후야, 농담은 그만하시지요.”

미진의 표정을 살피던 위지량은 다소 의아한 듯 말했다.

“그 두 사람이 동궁의 요패를 달고 있었다면 당연히 동궁 위랑들과 함께 죽었겠지요.”

 

눈송이가 미진의 가슴께에 내려앉았다. 그는 위지량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 얼굴은 너무도 영준하여, 웃는 모습만으로도 위지량의 온몸이 서늘해지는 듯하였다.—— 미라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위지량은 전부터 미라를 두려워하였다. 미진이 드물게도 이리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자 등 뒤로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네가 공소견을 숨겼다면 그런 것으로 치겠다.”

미진은 만사를 하찮게 여기는 듯 말하였으나, 눈가에는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찰작은 내게 돌려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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