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천주
2026. 6. 11.

다음 날, 금명석은 이번 행차에 데려온 복성 위병들을 둘로 나누었다. 그는 몸소 일천 병위를 이끌고 미진이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호송했고, 남은 사천 명은 제자리에 머물며 새 성주의 입성을 기다리게 하였다.

 

명왕 미라의 강역 판도(版圖)*는 두 나라에 걸쳐 있었다. 왕성인 아우성을 중심으로, 향령원은 의심할 여지 없는 명왕의 요충지였다. 향령원에서 서북쪽으로 간 곳에는 섭 씨의 대진(大禛)이, 동남쪽으로 간 곳에는 미 씨의 종고(終古)가 있었다.

*호적과 지도, 국가의 영역.

 

미리난은 조서에서 미라가 “삼부의 역적을 거느리고 북지에서 패거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실로 잘못된 말이었다. 삼라를 떠난 뒤, 미라는 소주(昭州)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향령원에서 대진의 변경 수비 대장 계백보(季百寶)와 여러 차례 싸웠고, 끝내 당해 내지 못 한 계백보가 후퇴하게 되었다. 대진 내부의 장수들은 미라가 소주를 지킨 후에 곧 철수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기세를 몰아 향령원으로 쳐들어간 뒤, 삼부 일진의 삼만 병마를 이끌고 성야(星夜)를 내달려 파죽지세로 향령원 전체를 삼켜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다.

 

전보가 대진 왕도(王都)에 전해졌을 때, 들리는 말로는 당시 갓 약관이 된 섭 씨 천자가 목 놓아 우느라 말도 못 하더니, “무른 좀벌레만 가득하고, 사내 하나 없다”고 소리치다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다. 반면 삼라에서는, 전보를 받은 미리난이 크게 기뻐하여 겉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내 아들이 기린의 종자이니, 적수가 될 이가 천하 어디에 있겠느냐”고 외쳤다고 하였다. 그는 여러 군신 백관을 불러 모아, 대첩을 거두고 도성으로 돌아올 미라에게 영광을 더해 주려 하였다.

그러나 미라는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휘하의 명장과 책사들과 함께 미리난의 소주와 원주(遠州) 두 주를 잇달아 집어삼켜, 종고의 서북 지도를 개가 물어뜯은 것처럼 만들었다. 이리하여 동원의 동북 경계에 세 나라가 균형을 이루어 대립하는 형세가 만들어졌다.

이 이십 년 간, 미리난은 동부의 여러 부족과 연합하여 미리난의 확장세와 침략에 맞서려 하였다. 그러나 미리난이 서남쪽의 나고국(那姑國)과 재차 우호를 닦았다. 그는 나고의 말을 들여오고, 서북쪽에 새로운 성지를 쌓아 향령원을 에워싼 형태로 미라를 못 박아 둔 채, 명왕의 병마가 다시는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 하게 하였다.

 

미라가 미진의 손에 죽자 동부의 여러 부족들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이들은 종고에 귀부하고, 어떤 이들은 대진에 투항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황야로 흩어졌다. 아우성은 미진이 있어 그나마 혼란을 피할 수 있었으나, 다른 성과 주는 모두 종고 병사의 강압적인 진압을 겪어야 했다.

 

그중 원주가 가장 참혹하였다. 원주 자사(刺史)* 조금(刁擒)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라의 사망 소식이 종고의 거짓 전언이라 여겼으나, 뒤이어 아우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늙은 장수는 눈물을 금치 못 하였다.

*군(郡)ㆍ국(國)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주에 둔 감찰관.

 

“세상일은 춘몽처럼 짧고, 인정은 추운(秋雲)처럼 얇구나.”*

조금은 폭우 속에서 성벽 밖을 바라보았다.

“그해 나는 폐하와 함께 향령원에서 여섯 번의 정벌전을 치루며 백전백승하였소.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폐하가 창을 들고 말을 세운 채, 위풍당당하게 몇 차례나 앞장서 적진에 뛰어들고 물리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이리 생각했었지. 동원을 통일한 섭유위(聶有為)가 살아 있어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 하리라고! 이 세상에 미라가 존재하는 것은, 필경 천신께서 세상에 수없는 고통이 있는 것을 보시고 중생을 위로하고자 그와 같은 기린의 혈통을 내려주신 것이라고 말이오.”

*작가 주: 주돈유(朱敦儒) 《서강월(西江月)·세사단여춘몽(世事短如春梦)》에서 인용.

 

빗물이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는 서글피 탄식했다.

 

“이십 년 동안 폐하께서는 아우성으로 물러나 계셨소. 여러 차례 알현하여 폐하께 동쪽의 각 부(部)를 정벌하시라 청했으나, 그분은 끝내 응하지 않으셨네. 바깥 사람들은 그 여인이 폐하의 마음을 흐트러뜨려 창을 내려놓고 출정하지 않게 된 것이라며 떠들어댔소. 법사, 그대도 걸명교의 법사이지. 정녕 모든 것이 그 여인의 잘못인가?”

 

조금의 뒤에는 흰옷을 입은 법사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노년의 법사는 몸에 천주(天珠)*와 황금화(黃金花)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조금에게 말했다.

“만사에는 본디 운명이 있는 법입니다.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기린의 종자이시거늘, 어찌 쉽게 타인에게 속아 넘어가셨겠습니까? 그분께서 동부 정벌에 나서지 않으신 것은, 향령원이 녹수원(鹿睢原)처럼 변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십 년입니다, 사군(使君)**. 원주와 향령원을 보십시오. 백성이 안거하고, 행상은 끊이지 않으니, 천하에 이를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왕후께서는 백의(白衣)***로서 속세에 들어와 각 부를 분주히 오가며 돌보셨습니다. 그러니 폐하와는 함께 하는 시간이 적고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지요. 이 역시 ‘천하의 도리’를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사군, 잘못을 논하고자 한다면 오늘날 가장 먼저 잘못을 인정해야 할 이는 바로 우리입니다!”

*히말라야 산맥 지역(특히 티베트)에 주로 분포하는 보주(寶珠)로, '하늘이 내리는 돌'이자 '구슬 속의 왕'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원통형 또는 타원형이며 표면에는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가 있다.

**당신. 상대방에 대한 존칭.

***불교에서 ‘속인(俗人)’을 달리 이르는 말. 인도에서는 승려가 아닌 사람은 모두 흰옷을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맞는 말이오……”

조금은 쓸쓸한 눈빛으로 성머리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명왕의 황금흑려기(黃金黑蜧旗)였다.

“잘못한 것은 우리구나…… 우리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폐하께서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셨겠는가?”

 

미라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자,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힘든 듯 저도 모르게 성벽을 짚고 서서 목멘 소리로 법사에게 말했다.

“법사, 그대는 가세. 우리 조 씨 일문(一門)* 열두 명은 모두 폐하의 큰 은혜에 기대어 살았네. 이 싸움은 이미 패국이 정해졌으니, 내 이 몸 하나 주군을 따라 죽음을 각오할 것이오. 지금 성 밑까지 쳐들어 온 자는 전여평(田如平)이네. 이전에 나와 폐하의 협공에 원주를 진수(鎮守)하지 못 하고 허둥지둥 달아났고, 그 때문에 미리난이 노하여 꾸짖었지. 이 사람은 심성이 편협하니, 원주에 들어오려 한다면 필시 병사들을 학살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풀려 할 것이오!”

*한 가문이나 문중.

 

전고(戰鼓)가 울리기 시작했다. 법사는 창궁(蒼穹)*을 우러러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걸명은 이미 쇠약해진 지 오래입니다. 폐하께서 어질고 후한 마음으로 우리를 경내에 거두시고 남은 목숨을 부지해 나가게 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걸명교는 진작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대는 내게 떠나라 하였습니다만, 나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사군, 그대가 폐하를 따라 전장을 누빌 적에는 화살 여러 대를 맞고도 돌격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내 오늘 ‘원주 제일의 맹금’의 위풍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요행을 얻어도 되겠습니까?”

*하늘.

 

“사람은 늙고 칼에는 녹이 슬었는데, 이제 와서 논할 위엄이랄 것이 어디 있겠는가?”

조금은 계단을 내려가 비장에게서 투구를 받아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원주를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영웅의 만년(晚年)이네. 이 몸뚱이를 그때와 비할 수는 없을 것이오. 법사, 오늘 그대를 실망시키게 될까 두렵구려!”

 

“사군께서는 함부로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법사는 그를 따라가는 대신 성벽 위에 선 채 호방하게 웃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든 이기지 못 하든, 천하의 대국은 바꾸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용맹하게 맞섰는가 맞서지 않았는가는 우리 역적의 명성에 따라오겠지요. 사군, 나는 이 전쟁에서 그대와 생사를 함께하겠습니다!”

조금이 크게 웃었다. 그는 말에 오르고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성문을 마주하고 장도를 뽑아 들었다.
“법사, 내 다음 생에도 그대와 술잔을 기울이며 도를 논하고 싶네—— 나 조금의 기세가 맹호와 같음을 하늘이 보지 못 하는구나. 병사들이여, 적을 죽여라!”

마침내 성문이 부서졌다. 조금은 선두에서 돌격했다. 그의 늙은 말이 흑조(黑潮) 같은 종고 병사들 사이로 달려들었는데, 뜻밖에도 그 날카로움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성벽에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법사는 자신의 천주와 황금화를 풀어 하늘에 바쳤다. 그는 비바람이 제 흰 도포를 찢어발기도록 내버려 둔 채 외쳤다.
“지고지상한 아희아(阿曦婭)시여, 삼십 년이 지났습니다. 어찌 당신의 백성을 가엾이 여기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당신께 아직 바라볼 눈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우리 걸명에게 업화를 빌려 주십시오!”

 

황금흑려기가 비바람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법사는 두 팔을 들어 큰 소리로 경문을 외웠다. 근 삼십 년 동안, 동원에서는 업화를 끌어낼 수 있는 걸명 법사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줄이 끊어진 구슬처럼 법사의 정면으로 빗물이 내리쳤다.

 

화살이 날아와 법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성벽에서 굴러 떨어진 법사는 말에서 추락한 조금과 함께 끝없는 철제(鐵蹄)*에 파묻혔다.

*말굽에 대어 붙이는 ‘U’ 자 모양의 쇳조각.

 

흑조가 뱀처럼 향령원을 뒤덮었다. 바로 그때, 미진이 눈을 떴다. 그는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천주, 마노(瑪瑙)*, 황금화가 엮인 긴 경식(頸飾)**이 가슴에 감긴 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진은 그것들을 움켜쥐었다. 전추가 공중에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수레가 덜컹거릴 적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석영단백석(蛋白石), 옥수(玉髓) 혼합물화학 성분은 송진과 같은 규산(硅酸)으로광택이 있고 때때로 다른 광물질이 스며들어 고운 적갈색이나 흰색 무늬를 띠기도 한다.

**목에 거는 장식.

 

어머니.

 

미진은 천주를 바라보았다. 이 경식은 엮인 모양이 독특하였다. 양 끝에는 정교하고 자그마한 황금화 한 송이가 달려 있었고, 절반이 붉은 마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불빛을 머금은 듯한 유리 구슬 몇 알이 섞여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천주가 놓여 있었다. 또한 양쪽에는 뱀 모양의 백골 걸쇠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서도순이 불평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진은 경식을 다시 왼손에 감고서는, 몸을 일으켜 휘장을 걷어 올렸다. 미진이 수레를 몰고 있던 용산에게 물었다.

“저자는 무엇 때문에 이리 시끄럽게 구느냐?”

 

“소 수레가 너무 느리다고 투덜대는 것입니다.”

용산은 서도순이 있는 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대머리가 그에게 말을 나눠 주지 않으려 한답니다.”

 

말은 군용 물자였다. 미리난 본인의 거가(車駕)*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허가받은 종실과 삼공(三公)만이 말이 끄는 수레를 탈 수 있었고, 일반 관원과 문벌 호족이 나다닐 때에는 소 수레만 탈 수 있었다. 미진의 거가 앞에 매인 이 네 필의 말도 본래는 미라의 것이었다.

*임금이 타던 수레.

 

“이놈들은 죄다 좋은 물건이 아닙니다.”

용산은 고개를 돌려 미진에게 말했다.

“저들이 떠나기 전에 우리 말을 모두 나눠 가져 버려서 형제들은 전부 뒤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라.”

미진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남겨 두어도 쓸모가 없다. 이 팔백 명이 삼라에 들어가면, 또 절반은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 안에는 형님께서 특별히 골라 태자께 먹여 기르라고 둔 말도 있습니다.”

용산이 마편 소리를 울리며 분한 듯 불평하였다.

“저들에게 짓밟히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며칠 전에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죽이면 아깝지 않겠느냐.”

살짝 고개를 든 미진의 두 눈에 폭풍이 서려 있었다.

“저들에게 주어야 낭비가 아닌 것이다.”

 

요 며칠, 용산은 금명석과 위지량 쪽에서 적잖이 고초를 겪었다. 그의 형은 용상(龍祥)이라 불렀고, 미라의 양자로 그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이들 형제는 동부 출신으로, 왕후가 외지에서 안고 돌아온 고아들이었다. 왕후가 늘 외지로 떠나 있었기에, 미진을 놀아 줄 이가 없을까 걱정하여 그에게 두 형제를 찾아 준 것이다.

 

용상은 일찍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동생을 이끌고 미진의 양 팔이 되겠다 맹세하였다. 어릴 적, 미진은 그들이 동원 말을 잘 하지 못 한다고 싫어하여, 늘 제멋대로 뛰어다니며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두 형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줄곧 미진의 뒤를 따라다녔다. 미진이 지붕 위로 올라가고 궁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까지 쫓아다녔으니, 그저 말을 타고 달아나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세 사람은 서먹하여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본 미라가 셋을 한 번씩 걷어찼고, 각자 한 발씩 얻어맞은 세 사람은 도리어 친밀해지게 되었다. 누구 하나 체면이 깎였다고 느끼지 않았다.

 

조금 더 자란 뒤, 아우성은 도원이 되었다. 동부의 여러 부족이 들어와 조현(朝見)*하여 네가 내 말을 빼았았다느니, 내가 네 땅을 차지했다느니 하며 미라 앞에서 다투는 일이 잦았다. 미라는 종종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미진을 서안에 앉혀 둔 채 자신은 융단에 드러누워 잠을 자기도 하였다.

*알현하다.

 

미진은 대단한 글자 몇 개도 알지 못할 시절부터 각 부의 잡무를 재가(裁可)했다. 그는 서안 앞에 앉아 한쪽 귀로는 아야가 요란하게 코 고는 소리를 듣고, 반대쪽 귀로는 각 부의 추수(酋帥)*들이 네 양이 내 말이니 하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말이니 양이니 하는 것은 미진도 분명히 셈할 수 있었으나, 그 뒤에 각 부의 은원이 얽히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미라는 송아지 같은 용상과 용산을 붙잡아 그의 양옆에 세워 놓았다.

*부락의 우두머리.

 

미진은 그들 형제에게 동원 말을 가르쳤고, 두 형제는 미진에게 각 부의 말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십여 년이 지나자, 그들 셋은 친형제가 아니었음에도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용상의 머리도 미진의 보갑 안에 들어 있었다. 그가 바로 미진이 죽인 그 형제였다.

 

“태자.”

용산이 말했다.

“저 도둑놈 같은 녀석이 자꾸 이쪽을 훔쳐봅니다.”

 

미진은 햇빛을 싫어했다. 그는 휘장을 붙잡은 채 내키는대로 물었다.

“어떤 놈이냐?”

 

용산이 마편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저놈입니다, 바로 저놈이요.”

 

미진이 시선을 돌리자, 용모가 평범한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름이 무슨 소견이었던가. 그는 시선을 살짝 옮기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아주 깨끗이 씻은 찰작은 대열 안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햇빛을 받기만 하면 두드러져, 주변의 삼라귀들을 모두 잿빛으로 초라하게 만들었고, 죄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였다. 위지량은 그들에게 또 훈시를 늘어놓고 있었다. 방금 전 눈에 들어온 찰작의 시선은 변덕스럽게 흩어져 있었으니, 딱 보아도 마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뻔하였다.

 

저 망할 놈.

 

미진은 찰작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 자객은 여전히 그를 보고 있었다. 거가 안으로 돌아가려던 미진은, 잠시 뒤 마음을 바꾸어 찰작에게 본때를 조금 보여 주고자 다시금 시선을 되돌렸다.

 

찰작은 미진을 보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미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위지량의 말은 그의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삼라로 가는 길은 참으로 길구나. 이 밉살스러운 귀신의 거가는 참으로 크기도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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