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지량의 병위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묘시*가 되어 날이 밝아오자, 쏟아지던 비도 마침내 멎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전장을 정리하게끔 하였다. 아우궁(阿憂宮)의 시인들은 땅에 엎드려 바닥을 꼼꼼히 닦고 있었다.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위지량은 회수한 요패를 모두 점검한 뒤,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선 두 사람을 다시금 훑어보았다.
“너희 둘이 이토록 영민하고 용맹하여 태자를 무사히 호위했을 뿐 아니라 온몸 성히 돌아올 줄이야.”
“조정의 갑옷을 걸치고, 장군의 군령으로 사기를 복돋았으니,”
찰작이 사람다운 말을 조리 있게 내뱉었다.
“온 힘을 다해 태자를 보호하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이지요.”
이 말에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위지량은 그가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알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말을 삼켰다.
“좋구나.”
위지량은 찰작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상국 천사(天使)*의 신분으로 항복한 신하들을 거두기 위해 왔다. 태자는 역당을 주살한 공이 있으며, 그의 안위가 조정과 재야, 사직에 관계되니 조금의 소홀함도 용납할 수 없다. 너희 둘이 이리 용맹하게 태자를 호가하였으니, 내 너희를 숙위 대장으로 승진시켜 각각 서른 명씩 거느리게 하겠다.”
*천자의 사신.
그는 말을 마친 뒤, 비장(裨將)*에게 명해 그들의 요패를 바꾸게 하였다.
“태자의 말씀에 따라, 임시로 너희 둘의 성명을 올려 두었다. 우선 이 패를 갖고 있어라. 돌아간 뒤에 바꾸어도 늦지 않으니.”
*부대장.
삼라귀의 편제는 엄격하여 요패를 바꾸는 일도 병조에 보고해야 했으며, 명적 심사도 아무리 빨라 봐야 보름 가까이 걸렸다. 그러므로 위지량이 지금 찰작에게 바꾸어 전해 준 요패는 동궁위랑의 것이었다.
이는 미진의 뜻이자 위지량의 뜻이기도 하였다. 그는 지난 밤 암살에 실패하여 기세를 잃은 상태였고, 금명석은 사람이 죽지 않은 이상 재차 자신에게 뒤집어씌울 기회를 남겨 주지 않을 터였다. 태자는 손 대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였지만, 또한 기화가거(奇貨可居)*할 만한 존재였다. 위지량은 전날 서도순이 한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만약 미리난이 미라 때문에 이 손자를 원한다면 어떠하겠는가? 그가 지금 미진에게 작은 호의를 보여 두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진기한 물건은 잘 간직하여 나중에 이익을 남기고 판다는 뜻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이르는 말.
게다가 고작 숙위 대장 둘이 해 보았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설령 계급이 하나 더 올라간다 한들 여전히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어디 멀리 뛰어나갈 수도 없을 터였다.
찰작은 새 요패를 살펴 보았다. 흑려가 새겨진 이번 요패의 뒷면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짜 태자구나. 아무리 이름 하나 새기기 어려운 요패라 할지라도 한 마디 명령이면 곧바로 준비할 수 있다. 찰작은 이렇게나 바람 같이 신속한 사람 곁에는 분명 강한 장수와 정예병이 한 무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그가 죽인 사람은 미라였다.
“장군!”
서도순이 몇 명의 시인에게 둘러싸인 채 손수건 하나로 얼굴을 연신 닦으며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이야기는 모두 전하셨습니까? 다 하셨다면 이제 들어가시지요. 태자께서 장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중대한 일이 남아 있는 위지량은 찰작과 또 한 명의 젊은이에게 말했다.
“밤새 고생했으니 우선은 내려가 쉬도록 해라. 조금 뒤에 사람이 찾아가 너희에게 교대를 서게 할 것이다.”
그는 미진을 급히 알현해야 했기에, 말을 마치자마자 서도순을 따라갔다. 찰작은 물을 뿌리며 청소하는 소리 속에서 고개를 돌려 그 젊은이를 훑어보았다.
“아, 너였군.”
이 젊은이는 다름 아니라 지난밤 혀를 먹었던 청년이었다. 그는 찰작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어색해하는 투로 대답했다.
“찰 형제……”
“기억력이 참 좋네.”
손을 등 뒤로 돌린 찰작의 두 눈에는 아직까지 빗방울이 어려 있는 듯했다.
“내가 너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저는 공소견(孔小犬)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는 감히 찰작을 똑바로 보지 못 했다.
“당신은…… 저를 소견이라고 부르십시오.”
그 이름은 천성부의 처지에 퍽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과거 4진이 미리난을 따라 봉기하였을 때, 관할 부호(府戶)*들은 모두 병호(兵戶)로, 대대손손 병역을 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미 씨의 본부와 4진에 원적을 둔 자제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위는 일반적인 민호보다 조금 더 높았다**. 그러나 해마다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병사의 소모가 막대해지자,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각 주에서 신병을 징수해야 했다.
*군호의 일종. 북위 시대에 군부에 소속되어 대대로 병역을 집행한 호적을 말한다.
**작가 주: 일부 자료는 《위진남북조 병제 연구》를 참고함.
신병 중에는 민호나 죄적(罪籍)*도 있었기에, 이름은 자연스럽게도 문벌 호족처럼 완곡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을 수 없었다. 때문에 칠아나 소견 같은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죄인의 명부.
“공소견.”
찰작은 호기심이 이는 듯 말했다.
“몸이 이렇게도 날쎈데, 이전에 전쟁을 경험한 적이 있나?”
지난밤의 소동에는 철저한 훈련을 받은 병사들뿐 아니라, 수도 없이 사람을 죽여 본 자객들도 섞여 있었다. 그는 일개 천성의 병졸이다. 어떻게 화를 피한 것인가?
“제가 어찌 감히 남과 격투를 벌이겠습니까.”
공소견은 얼굴이 붉어졌다.
“……별달리 몸놀림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전에 역노(力奴) 노릇을 하여 힘이 강하고, 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역노는 동원의 호족들이 기르는 노복의 일종이었다. 그들은 체격이 우람하고 온순하며 말을 잘 들었고, 아이의 탈것 역할을 할 수도 있었으며, 문을 지키는 개가 될 수도 있었다. 문신이 새겨지지 않은 역노 하나는 보통 매우 값이 높아, 호족들이 금을 뿌리며 부를 겨루는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방금은 고마웠습니다, 찰 형제.”
공소견은 자기 발끝을 바라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저를 숨겨 주신 데다가 함께 숙위 대장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양하지 마라. 우리 모두 천성부에서 온 사람이니.”
찰작은 퍽 다정한 말투로 답했다.
“앞으로 함께 돌보아야 할 곳도 많을 것이다.”
이쪽의 두 사람이 자리를 뜬 뒤에도 저쪽의 위지량은 계단 아래에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신분으로 따지자면 본래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명석이 지난밤 그가 농간을 부린 일을 원망하여, 오늘은 기어코 그를 한 번 다스리려 한 것이다.
“본래라면 금중(禁中)* 당장이 태자를 뵐 때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지. 위지 아우도 스스로를 상국 천사라 자부하니, 그 신분이 보통이 아니지 않은가. 나와 함께 서 있는 것도 마땅한 일이오.”
이미 갑옷을 벗은 금명석의 오른쪽 어깨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는 옆에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대 출신이 그렇지 않나. 남을 보면——”
*궐내, 궁중.
그가 하려던 말은 “남을 보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금명석은 부러 “사람을 보면”이라는 말을 길게 끌더니 위지량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은 아니지. 다만 태자는 남이 아니니, 그대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그리 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 삼라의 예를 잃어서는 안 될 일이니.”
위지량은 평소와 달리 황공무지하게 땅에 엎드렸다.
“금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신이 곤도 옛 부하의 몸으로 금위군에 목숨 바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지존의 성명하신 은총에 힘입은 것입니다. 지존께서 외족이라는 이유로 하신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으니, 하신 또한 아둔하고 어리숙한 마음으로 공무를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밤의 일은 급작스럽게 벌어져 하신이 금위군 당장으로서 해야 할 대응이 황급하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께서 보살피시어 태자께서 다치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천만다행입니다!”
금명석은 그저 두어 마디 찔렀을 뿐이었다. 허나 그가 그대로 기세를 타고 번듯하기 그지없는 말을 한바탕 늘어놓을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분명하였다.
우선 그는 확실히 곤도의 투항 장수였으나, 미리난이 아직 그를 쓰는 이상 누구도 그를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둘째로는 지난밤 동궁을 호위한 주력 인원이 삼라귀가 아닌 금명석이라는 점이었다. 금명석이 동궁위랑과 충돌했고, 그 틈을 타 혼란이 벌어져 하마터면 태자를 해칠 뻔하였다. 위지량은 기껏 해 봐야 그를 구하러 온 것이 조금 늦은 것에 불과했다. 셋째로, 태자가 다치지 않은 것은 삼라귀의 요패를 건 사람이 태자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금명석은 어디 말로 꺼내지도 못 하는 손해만 본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 애초에 저 놈들이 동원 말을 배우게 두지 말았어야 했다! 잔말이 줄줄 이어졌다. 무슨 성명하신 은총이니, 무슨 어쩌구 둔하고 어리숙하다느니, 하마터면 알아듣지도 못 할 뻔하였다!
“이제 막 아우성에 귀부한 참이니, 궁궐 안팎의 검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금명석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이를 사리문 채 말을 짜내었다.
“말장(末將)*이 태자의 어가를 무례하게 어지럽혔으니, 실로 죽어 마땅합니다.”
*옛날, 장군이 자신을 낮추어 일컫던 말.
금명석은 본래 배치가 분산된 틈을 타 누군가가 파고들었다고 말하려 했었다. 그러나 일찍이 주공으로부터 들은, 그가 일을 처리할 때에는 충동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어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한다는 이야기에 따라, 이번에는 아예 인정해 버리기로 하였다. 자신의 검사가 철저하지 못 한 탓이니, 미진에게 능력이 있다면 자신을 잡아보라고. 그는 성 밖에 복성 근위병 오천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 미진은 되려 아주 여유로운 태도였다. 태자는 “구출”된 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 차림을 바꾸었다. 그는 지금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짙은 검은색의 큰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옷깃과 소매 가장자리의 장식에는 짙은 색의 자려(紫蜧)*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허리에는 가죽띠와 뱀 모양 옥대구를 찼으며, 옆에는 그의 신분을 상징하는 여두반낭이 있었다.
*자주빛 여(蜧).
이 차림은 미진의 신분에 부합하기는 하였으나, 고작 이 몇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입기에는 너무나도 장중해 보였다. 그러나 태자가 제멋대로 앉아 있는 모양새가 그 무게감을 다소 보완하였다. 그는 몸을 살짝 비스듬히 기울이고, 팔꿈치를 한쪽의 삼족탁자 위에 얹은 채, 웃는 듯 마는 듯한 투로 말했다.
“미라의 역적 잔당이 아직 뿌리 뽑히지 않았으니, 궁 안에 쥐 몇 마리가 뛰어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내 보기에 이 일은 이쯤에서 넘어가도 될 것 같구나.”
뜻밖에도 그는 조금의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미라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서도순은 마음 깊이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도순이라는 상시는 밖을 다닐 적에는 매우 위풍당당했으나, 궁으로 돌아오면 매 순간마다 수완을 부려 잘 대처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미리난은 독단적이고 전횡적인 데다가, 최근에는 나이가 들며 희로애락을 더욱 짐작하기 어려워졌다. 그가 미진을 보고 싶어 한다면, 미진은 되도록 온전한 상태로 데려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백만의 시체가 온 땅에 굴러다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태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서도순은 미진의 말에 수긍하며 말했다.
“유구니, 난당이니 하는 것들이 온 땅에 널려 있으니,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장군들께서 잠은 제대로 주무실 수는 있겠습니까? 태자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실 수는 있겠습니까? 태자께서 말씀하신대로 자객들이 모두 처리된 것이라면 이 일은 서둘러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진이 큰일을 작게 만들겠다 하니, 위지량과 금명석도 당연히 기꺼웠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막 놓이려는 순간, 태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객의 일은 그렇다 치도록 하지. 허나 너희가 나의 동궁위랑을 놀라게 하였으니, 이 일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용산, 네가 장군들에게 사상자를 보고해라.”
지난밤의 동궁 당장은 투구를 벗고 있었다. 그 역시 종고인은 아니었고, 나이는 스물 초반으로 태자보다 조금 많아 보였으며, 약간 짙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는 계단 아래의 금명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상이 열여섯, 중상이 셋, 사망이 서른 명입니다.”
금명석은 당장의 종고 말이 유창하지 않다는 것을 어젯밤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가 “서른”이라는 말을 유난히도 무겁게 발음하는 것을 듣자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동궁위랑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외족의 개자식이 먼저 그의 병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번거롭게 그들과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른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사망한 사람이 삼백 명이라 하여도 마땅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지 않았으니, 그는 나름대로 미진의 체면을 세워 준 셈이었다.
“종고의 제도에 따르면, 동궁위랑은 모두 팔백 명이 있습니다. 태자께서는 역당을 주살하기 위해 온갖 억울함을 견디셨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또……”
얼굴에 침통한 기색을 드러낸 위지량은 금명석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금 장군, 이 일을 어찌 좋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금명석은 곧바로 대답했다.
“너 이——”
“정말 안 될 일이지요.”
서도순이 옆에서 거들었다.
“장군께서는 어제 바깥에서 크게 호통을 치셨기에 이미 크게 예를 어겼습니다. 허나 태자께서 장군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니, 장군께서는 이를 더욱 경계로 삼으셔야 합니다.”
“네놈들……”
금명석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답했다.
“그래…… 좋다, 좋아! 송구합니다만, 말장이 감히 태자께 묻습니다. 제가 어찌 책임을 물기를 원하십니까? 저 금명석에게 다른 것은 없어도, 목숨 하나는 있습니다!”
미진은 금명석을 바라보았다. 올해 막 스물이 된 태자의 두 눈은 깊고 고요했다. 지난 밤의 발작 때문인지,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욱 짙은 색을 띄고 있었다. 궁실의 문과 창은 활짝 열려 있었음에도, 하늘이 아직 충분히 밝아오지 않아 빛이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앉아 있는 이는 빛에게 잊힌 사람이라기보단 감히 빛이 비출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아직 나이가 적었음에도, 이렇게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당년의 미리난과 꼭 닮아 보였다. 다만 아쉽게도 미리난은 미진과 같은 체격을 갖고 있지 않았다.——미진의 조모는 금오 출신으로, 금오는 천하에서 가장 건장하고 키가 큰 부족이었다.
“내가 네 목숨을 가져 무엇 하겠느냐?”
미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희롱하듯 말했다.
“쉰 명. 내게 배상하거라.”
금명석의 등골에 스며들던 한기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서도순은 서둘러 말했다.
“백 명으로 하시지요. 복성왕 쪽에는 소인이 알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군, 어서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저희는 아직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금명석은 고개를 숙이고 은혜에 감사를 올렸다. 위지량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먼지 가라앉듯 마무리 되었으니, 서 상시, 그대가 태자께 칙유를 읽어 드리시오.”
“아이고, 소인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글자도 다 알지 못합니다.”
서도순은 고개를 돌려 금명석을 향해 정성스러운 투로 말하였다.
“역시 장군께서 하시지요. 저희는 공손하게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두 사람이 핑계를 대며 서로 미루는 모습을 보자, 금명석은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금 미진과 마찰을 일으킬 뻔한 처지였다. 그러니 지금은 더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서도순이 데려온 시인은 눈치가 빨랐다. 금명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칙유를 그의 손에 받들어 올렸다.
칙유를 본 금명석은 하마터면 크게 한 마디 욕을 내뱉을 뻔했다.
칙유는 매우 간단했다. 공을 표하고 위로를 전하는 빈말을 제외하면, 사실상 의미가 있는 내용은 미리난이 미진에게 자를 내려 주겠다는 한 마디뿐이었다. 그는 앞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미진을 이 자로 부르게 하려 하였다.
무야(無耶).
아비 없는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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