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줄리앙20
“타오 형사님, 감식 결과, 별다른 문제가 없고 그저 제가 민감하게 반응한 거라면… 번거로우시겠지만 이 일을 비밀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류 변호사가 타오란에게 건 전화는 이걸로 세 번째였다.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차라리 30분 전으로 돌아가서, 당신에게 전화를 건 자신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타오란은 질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변호사는 정말로 신경쇠약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류 변호사는 계속해서 강조했다.
“소문이 퍼지면 정말 이 바닥에서 못 버티게 될 거예요.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정말, 정말 부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앞으로도 이 일로 먹고 살 수 있을지는 당신 손에 달려 있어요.”
타오란이 약속하겠다는 말을 한 것도 이걸로 세 번째였다. 이대로라면 하늘에 맹세하고,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해야 할 기세였다. 바쁘게 눈치를 보던 변호사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것인지 넥타이를 시국에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겨우 그와의 대화를 마무리한 타오란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뒷좌석의 여성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타오란은 영화를 보던 도중에 류 변호사의 연락을 받았다. 마침 남녀 주인공이 이별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타오란과 함께 있던 그녀는 결국 눈물과 비난을 쏟아내는 장면을 뒤로 한 채 그와 함께 퇴장해야 했다. 소개팅의 시작으로는 정말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는 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며 그를 이해하듯 배려하기까지 했다.
“많이 바쁜 거면 나 혼자 갈게. 기사님, 저는 앞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내릴게요. 제가 내리면 그를 데려다주시겠어요?”
난처해진 타오란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신경쓰지 마. 우리도 자주 주말에 출근해서 잔업하는걸.”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우리 회사원들은 사장님과 월급을 위해서 일하는 건데, 너희는 공공 안전을 위해서 일하는 거잖아. 인터넷에서 재벌 2세 살인사건 얘기는 봤어. 빨리 해결해야지.”
타오란은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아니, 꼭 그 재벌 2세가 범인이라고 정해진 건… 아직 범인이 확정되진 않았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택시는 지하철역 근처에 도착했다. 기사는 웃으며 차를 세우더니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무언가 떠오른 듯 타오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지역에서 동창을 만나서 그런지 정말 반가웠어.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 게 조금 난처하긴 했지만.”
땅에 구멍이라도 있었다면, 타오란은 분명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들었을 것이다.
타지에서 소개팅을 하는데, 고등학교 동창과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동창이 당시 짝사랑하던 사람일 확률은?
물론, 그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소개팅 상대가 오드리 헵번이었다 해도, 그녀를 두고 돌아가 야근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그녀가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흐트러졌던 정신이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타오 부팀장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다시금 사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는 그를 곁눈질하더니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젊은이, 내가 보기에 잘 될 것 같아.”
타오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사님, 이 앞에서 유턴해서 시국으로 가주세요.”
이 중년의 기사 아저씨는 남녀의 연애사 외에 ‘재벌 2세 살인사건’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 한참 수다를 떨고 싶어 했다. 타오란은 그제서야 차를 빌려주겠다는 두 사람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는 옆에 앉은 수다쟁이의 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졸린 척을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소리가 나오는 앱을 아무거나 적당히 틀어 귀를 막아버렸다.
이어폰 속에서는 오디오 북의 음성이 잔잔한 배경 음악과 함께 흘러왔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다면,' 줄리앙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대체 제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 앱은 사용자가 몇 명 없는 오디오 북 플랫폼이었다. 최근에 나온 인기작은 거의 다루지 않았고, 대부분은 낡아빠진 고전뿐이었다. 평소에는 수면을 유도하는 듯한 에세이를 무작위로 틀어주고, ‘낭독자’로 선정된 사용자만이 원하는 책을 요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낭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장문의 감상문을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감상문이 편집부의 채택을 받은 다음에야 신청한 오디오북이 플랫폼에 업로드된다. 전편이 모두 업로드된 뒤에는, '낭송자'의 감상문이 공유되어 다른 청취자도 함께 읽어볼 수 있었다.
타오란은 앱을 실행하기는 했지만, 내용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어 제대로 듣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소음을 막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했을 뿐이었다.
택시는 우회로에 들어서며 곧 시국에 도착할 듯했다. 오디오북을 끄려 하던 타오란의 귀에 종료를 알리는 나래이션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스탕달의 《적과 흑》 이었습니다. 이어서 이번 책의 낭독자, ‘낭송자’님의 감상문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타오란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원래라면 금요일 저녁은 즐겁고 편안한 날이어야 했다. 도시 전체가 주말을 맞이하며 들뜬 시각에, 시국의 형사들은 모두 야근 중이거나 야근을 하러 가는 처지였다.
뤄원저우는 타오란과 랑차오의 전화를 받은 뒤 병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마침 페이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이 총에게 별다른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공립병원의 혼잡함과 조악함이 거슬려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드물게도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고, 행동력은 배가 되었다. 페이두는 곧장 비서에게 차를 보내라고 지시했고, 뤄원저우는 염치없이 그의 차를 또 얻어탔다.
이미 밤 열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랑차오가 위챗으로 보고한 수사 진척을 읽어 본 뤄원저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다가 황량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법의관의 예비 소견으로는, 천전의 사인이 마약 과다 복용이라는 듯해.”
페이두는 병원에서 뤄원저우의 일방적인 ‘잡담’을 들으면서 자신의 애차가 폐차된 대략적인 전말을 알게 되었고, ‘천전’이 누구인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옆에서 피 비린내가 풍겨오는 것도 아니고, 실내는 적당히 따뜻했으며, 방금 막 비서가 전달해 준 야식을 먹은 참이었다. 페이두는 안정적으로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우고선, 빨간불을 기다리던 틈에 옆에 있던 바나나 우유를 들어 몇 모금 마셨다. 바나나 우유의 단맛에 한결 차분해진 그는 덤덤하게 한 마디를 흘렸다.
“조금 이상하네요. 별로 문명적이지 않아요.”
뤄원저우는 페이두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명’이라는 단어에 그를 한 번 흘겨보더니 입을 열었다.
“범죄자들 상대로 그렇게까지 큰 기대를 할 수 있을 리가.”
페이두는 그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한들 언제나 목숨을 거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당신을 몰아 붙이려던 사람들이 총을 꺼내든 것도, 정체가 드러난 이상 당신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목숨이 끝장나는 걸요. 결과가 두려우니 그정도로 미쳐 날뛸 수 있었던 거예요. 이런 인과관계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사회에서 오래 버티고 살아남는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미쳐 있지 않아요.”
이 점에 대해서는 뤄원저우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쉐춘은 천전이 ‘안전하다’고 했다. 그녀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가 목격했을 당시에는, 황 팀장 일행이 사람을 죽일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상대가 천전이나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우쉐춘과 그리 오랜 시간 잡담을 나누게 두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천전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 이 죽음은 우연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마약을 투여한 게 그들이었을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늘상 약을 다루던 사람들이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 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죠.”
페이두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마약 밀매 조직을 비호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 저라면, 낯선 사람이 민감한 걸 캐물으며 불쑥 들이닥쳤을 때, 절대로 성급하게 죽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마치 날씨 얘기하듯 차분하게 떠드는 목소리에 뤄원저우는 두피가 저려오는 듯했다.
“그럼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우선 붙잡아서 배경을 파악해야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배후에는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그 다음엔 마약, 폭력, 협박, 위협 같은 수단을 사용해서 의지를 무너뜨려요. 그러다 그 사람이 당신과 접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정식 정보원도 아닌 데다가, 신뢰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할 가족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거죠.”
페이두는 바나나 우유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음 단계에서는, 마약을 조금씩 투여해서 중독되게 만들고, 정신이 흐려졌을 때 당신이 그를 팔아넘겼다고 세뇌시켜요. 당신과 그들이 한통속이라고 믿게 만들면, 그는 절망에 빠져 ‘세상에 공정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되죠.”
뤄원저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평가했다.
“정말 도덕 관념이라곤 없는 놈이라니까.”
페이두는 그 평가를 무시한 채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약에 중독된 그에게 달콤한 온정을 조금씩 보여줘요. 우리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며 인간적인 면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그러면 끝이에요. 그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죠. 그를 손에 넣게 되는 거예요. 나중에 당신들이 온갖 방법을 써서 그를 구해낸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익 분배를 문제로 다투고 있고, 그들이 너를 구한 것도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속삭여주면 돼요. 그러면 그는 당신이 배신했다고 생각해 원한을 품고, 당신들 내부에 박힌 못처럼 굴게 되겠죠.”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탓인지, 차 안에 퍼진 바나나 우유 냄새가 진지함을 틀어막은 탓인지, 뤄원저우는 그의 황당한 논리를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잠시 조용히 있던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네가 언젠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우리도 제법 곤란해질 거야.”
페이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뤄원저우는 어조를 바꿔 말을 이었다.
“근데 넌 그냥 말로만 떠들었지. 그걸 들은 사람도 나뿐이야.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고, ‘완전 범죄 특별 세미나’ 같은 걸 열지도 않았어. 그 덕에 우리도 부담이 줄어, 가끔은 휴가도 내고 연애도 할 수 있게 됐어. 조직을 대표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도 되겠지.”
“……”
평소와는 다른 그의 반응에 페이두는 할 말을 잃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뤄원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는 특별히 홍금기를 하나 더 줘야겠군. 더 원하는 게 있어? 참고할 테니 언제든 말해도 돼.”
페이두는 시국에 도착할 때까지 더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국 앞에 도착한 뤄원저우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차 한 대가 그의 옆에 급히 멈춰 섰다. 차가 멈추기도 전에 랑차오가 뛰어내렸다.
“팀장님, 마샤오웨이가 없어졌어요!”
“소란스럽게 굴지 마.”
방금 막 상처를 꿰맨 탓에 아직 몸이 반쯤 마비된 뤄원저우는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사라졌다니 좋은 일 아니겠어.”
원래도 큰 눈이 동그래져 두 배로 커진 랑차오는 입만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무심코 뤄원저우 뒤편으로 시선을 옮겨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저건……”
뤄원저우가 고개를 돌리자, 건너편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시국 쪽을 살피는 왜소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누군가가 다가와 그를 데리고 길을 건넜다.
랑차오가 소리쳤다.
“마샤오웨이랑 그 분국의 안경잡이!”
샤오하이양은 결국 부러진 안경을 새 걸로 바꿨고, 다소 딱딱한 사각테 때문에 몇 살은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는 마샤오웨이를 데리고 뤄원저우 앞으로 다가왔다.
“뤄 팀장님.”
그를 본 뤄원저우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 들어가자.”
시국 안은 주말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부검, 넥타이 감정, 증인 심문에 범인 취조까지 겹쳐 형사팀과 법의과의 모든 사람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당직실에 머무르던 허중이의 어머니도 놀라서는 살짝 스치는 바람결마다 애타게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살펴봤다.
뤄원저우 일행이 마샤오웨이를 데리고 들어올 때, 허중이의 어머니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뤄원저우를 한 번 쳐다본 그녀의 의심 가득한 눈길이 마샤오웨이에게로 옮겨졌다.
뤄원저우가 마샤오웨이에게 말했다.
“저분이 허중이 어머니야.”
맥 빠진 걸음으로 걷던 마샤오웨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윈 여자와 초췌한 소년이 서로를 마주했다. 허중이의 어머니는 한참 후에야 소년의 모습에서 아들을 떠올렸는지, 무언가를 시험하듯 마샤오웨이에게 질문했다.
“너… 너 우리 아들이랑 아는 사이니?”
마샤오웨이는 반사적으로 반 걸음 물러났다.
“우리 중이는 착한 아이였어. 너 우리 아들을 아는 거지? 그렇지?”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다가가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마샤오웨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는 목을 바짝 세운 채 가늘고 긴 숨을 들이켰다.
“누가 우리 아들을 죽인 거야? 응? 얘야, 아줌마한테 알려 주렴. 도대체 누가 우리 아들을 죽인 게야?”
마샤오웨이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갑작스럽게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예요!”
그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제가 중이 형한테 못 할 짓을 했어요. 아줌마한테도요… 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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