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줄리앙14
“피해자 분석이 제일 싫어요.”
랑차오가 입술과 코 사이에 펜을 걸고 입을 삐죽였다.
“가끔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아무리 해도 마음속에서 납득이 안 가요. 왜 이 사람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왜 운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해야 하지? 왜 열심히 살던 누군가의 삶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인간 말종 때문에 허무하게 끝나야 하는 거지? 그런데 반대로, 피해자도 무언가 죄를 지었거나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할 만한 사람이면, 그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게 돼요. 가해자를 체포하는 게 오히려 나쁜 짓을 돕는 기분이 들어서… 저는… 아야!”
뤄원저우가 서류를 말아 종이 막대를 만든 뒤, 랑차오의 뒤통수를 탁 치며 장황한 넋두리를 끊었다.
랑차오가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제가 뭘 했다고 때려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는 생각이잖아요. 경찰도 사람인데!”
“월급 필요해, 안 필요해?”
“…필요해요.”
“그럼 잔말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
뤄원저우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화이트보드를 끌어와, 이마에 초승달 모양 흉터가 있는 소년의 사진 밑에 '허중이, 남, 18세, 배달원, H성 출신' 따위의 기본 정보를 적었다.
그리고는 큰 키를 활용해 화이트보드 위로 시선을 넘겨 사무실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허중이의 어머니 옆에 앉아 있는 페이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은 건지, 장둥라이의 석방에 크게 절망한 상태였다. 더는 하소연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믿어버린 것인지, 무너지듯 오열하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고, 결국 페이두가 부축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동아줄이라도 잡듯 본능적으로 붙잡은 것이었을 수도 있고, 페이두가 장둥라이 일행과 한패라고 생각해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진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 덕에 페이두는 시국에 억지로 남아야 했고, 지금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젊은 성인 남성인 페이두가 그녀를 억지로 떼어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초라한 병든 여인 곁을 조용히 지켜주며 함께 앉아 있기를 선택했다.
허중이의 어머니는 지쳐 무너질 듯하던 절망에서 조금 벗어나 정신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상태였다. 뤄원저우는 페이두가 그녀의 손을 잡고선 몸을 기울여 조용히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말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차츰 진정하기 시작했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며 반응하기도 했다.
“마샤오웨이는 풀려났어?”
뤄원저우가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타오란은 전화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아니. 분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마샤오웨이가 그쪽에서 마약 금단 증상이 나타났대. 경찰이 그의 집에서 소포장된 마약을 대량으로 발견해서, 그냥 그대로 구류 중이라고 하더라.”
“심문한다는 핑계로 이쪽에 부를 수는 없는 거야?”
타오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된대. 상태가 불안정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분국에서 책임 질 수 없다고. 정 조사하고 싶으면 우리가 직접 분국으로 찾아오라던데.”
왕훙량은 아예 마음을 굳힌 듯, 마샤오웨이와 접촉할 틈을 만들지 않았다. 그가 박물관의 귀중한 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것은 괜찮아도, 데려가려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형사 두 명이 종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팀장님, 허중이의 개인 물품을 전부 가져왔습니다. 조사가 끝나는대로 가족에게 돌려드리면 됩니다. 혹시 쓸모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확인 부탁드려요.”
허중이의 소지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옷이 몇 벌 들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배달 회사에서 직원에게 지급한 작업복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기본적인 생활용품과 버리지 않은 휴대폰 상자, 그리고 일기장이 한 권이 전부였다.
그러나 일기장 속에 적힌 내용은, ‘일기’라기보다는 장부나 메모에 가까워 보였다.
허중이는 배달 일 외에도 단기 아르바이트나 임시직을 종종 했던 듯 늘 자잘한 수입이 있었다. 모두 모으면 웬만한 신입 사원의 월급과 맞먹을 정도였다.
장부는 아침 식사 2위안 5마오 같은 사소한 지출도 기록돼 있을 만큼 아주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몇 장을 넘기보던 뤄원저우가 손을 멈췄다.
“피해자 이마에 붙어 있던 쪽지 사진 어딨지?”
그러자 형사 한 명이 쪽지의 확대 사진을 꺼내 뤄원저우에게 건넸다.
쪽지에는 ‘돈钱’이라는 글자가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꾸불꾸불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오른쪽의 삐침이 지나치게 커서 글자의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했고, 전반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았다. 허중의 장부에 적힌 ‘돈’이라는 글자와 동일한 필체였다.
“이건 피해자 본인이 적은 거야.”
타오란이 놀라며 말했다.
“잠깐만, 기억난 게 하나 있어. 허중이는 그 날 밤 청광공관에 갈색 서류봉투를 하나 들고 왔어. 설마 거기에 쪽지가 들어 있었던 걸까? 그 봉투도 어딘가에 사라졌잖아. 그 안에 뭐가 있었을까?”
뤄원저우는 허중이가 쓴 장부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현금일 가능성은? 여기 봐 봐.”
창밖에서는 페이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중이의 어머니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병원비로 쓴 돈이 꽤 크네요. 하지만 중이는 막 옌청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한 시기였을 텐데, 그렇게 큰 돈이 어디에서 난 건가요?”
그녀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가에서 미리 준 월급이라 했어요.”
“공가?”
페이두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에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아, 직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허중이의 어머니는 몸도 허약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농촌 아낙이었기에, 육체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 노동자도 고용주도 서로가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처지였으니 임금은 대체로 일급이며, 임금을 선불로 주는 사장은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백 번 양보해, 고용주가 선한 사람이라 임금을 미리 준다고 해도 보통은 두세 달치가 고작이다. 하지만, 그녀의 치료비로 든 돈은 일반적인 배달원의 몇 년치 월급에 해당했다.
이런 금액은 몸을 팔면 모를까 단순 노동만으로는 절대 갚을 수 없었다.
남색에도 통달한 페이 총은 카페에서 스치듯 본 허중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외모만 두고 따지자면, 그 소년에게 그정도의 가치는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만한 거액을 빌려주었으며, 허중이는 어째서 친엄마에게조차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
허중이의 장부에는 출처 불명의 빚 '10만 위안'이 기록돼 있었다. 모든 시국 형사들이 이 빚의 출처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그의 직장과 주변 인물들을 샅샅이 수소문했지만, 모두들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돈을 빌려줬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찾기는 커녕, 빌린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뤄원저우와 타오란이 시국으로 돌아왔을 때, 허중이의 어머니는 의자 몇 개를 이어붙여 그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고, 페이두가 어디선가 구해 온 얇은 담요를 그녀에게 덮어주고 있었다.
타오란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호텔에 모셔가겠다고 했는데, 안 가겠다고 하셔서요. 여기에 남아서 범인이 붙잡히는 걸 지켜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대요.”
페이두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는 땀으로 젖은 타오란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내밀었다.
“늘 이렇게 고생하는 거예요? 보니까 마음이 안 좋네요.”
타오란이 대답하기도 전에 뤄원저우가 차갑게 끼어들었다.
“인민경찰은 원래 이래. 안쓰러우면 세금이나 더 내고, 사고 좀 덜 치도록 해. 페이 총, 말 나온 김에 말인데, 너 같은 재벌 사장들은 하루 종일 바쁘다면서. 근데 너는 시간이 남아도는 것 같다?”
페이두가 미소지었다.
“제가 먹여 살리는 전문 경영인들은 뭐 하려고 고용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경영 상황까지 신경써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제가 전 재산을 다 날린다고 해도, 제 은행 이자가 당신 평생 월급보다 많을 테니까요.”
타오란은 입을 다물었다.
이 둘은 도대체 3분 넘게 평화롭게 지내는 일이 없다. 또 시작이었다.
타오란은 양팔을 벌려 두 사람을 억지로 갈라놓았다. 한 손으로는 뤄원저우를 사무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페이두를 향해 경고하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페이두는 조금도 개의치 않다는 듯 장난스럽게 그의 손가락을 살짝 꼬집었다.
뤄워저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저 자식이 지금…”
타오란은 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싸울 거면 나 퇴근하고 나서 실컷 싸워.”
그의 말에서 뭔가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챈 뤄원저우가 물었다.
“응? 오늘 약속 있어?”
타오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개팅하러 가.”
뤄원저우가 멍하게 굳었다.
타오란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슬슬 나이가 찼잖아. 이 이상 너랑 같이 독신 귀족 노릇을 할 순 없지.”
뤄원저우는 잠시 시선을 떨구며 생각에 잠기더니, 얼마 안 지나 미소를 지으며 타오란을 가리켰다.
“이 배신자. 한마디 말도 없이 조직을 나가려 한다니. 우리 불멸의 ‘죽어라 그룹’이 널 용서치 않을 거다.”
타오란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뇌물 하나 줄게. 나중에 애가 생기면 너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시키지. 어때?”
“됐어.”
뤄원저우가 손을 내저었다.
“뤄이궈 하나로도 힘들어서 애 아빠 놀이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조국의 미래는 너 같은 이성애자들이 열심히 책임져야지. 가라, 오늘 여기 남아 있어도 단서 하나 안 떨어질 텐데, 뭐. 범인이 장둥라이 옆에서 계속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면, 아마 이틀 내로 움직일 거야. 우린 조사하면서 기다리자.”
타오란은 고개를 저으며 짐을 챙겼다. 나가려던 순간, 뤄원저우가 불쑥 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배신하니까 진짜 실연당한 기분이야.”
중얼거리듯 말한 뤄원저우가 어조를 바꾸며 말했다.
“아 맞다, 주택 대출 노예. 차라도 빌려줄까?”
“필요 없어!”
그날 밤, 장둥라이는 장팅에게서 자신이 유치장에 끌려가게 된 전말을 전해 들었다. 변호사의 공로가 크다고 판단한 그는, 집에 돌아가 유자잎으로 깨끗하게 샤워한 뒤, 변호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대형 자본가들을 위해 비소송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료들과 달리, 형사 변호사는 위험과 압박이 큰 반면 돈도 많이 벌지 못 한다. 이렇게 당사자가 어수룩한데다가 돈은 많고, 사건이 복잡하지 않은 케이스는 흔치 않았다. 자오하이창이라는 동창이 아니었다면, 이런 호재를 얻을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장둥라이는 변호사에게 예의 바르게 봉투 하나를 건네고는 직접 차로 데려다 주겠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나 식당에서 막 나왔을 때, 9등신의 미녀가 다가와 장둥라이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더니 자연스럽게 그의 차에 올라 탔다.
변호사는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뒷좌석에 앉고선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미녀와 장둥라이는 듣는 사람을 민망하게 할 만큼 노골적으로 애정 행각을 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낯이 두껍지 않았던 변호사는, 공기가 된 기분으로 조용히 뒷자리에 기대 휴대폰을 만지는 척했다. 사거리를 지나던 중, 장둥라이가 브레이크를 세게 밟는 바람에 변호사의 몸이 앞으로 쏠렸고,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좌석에 있던 물건이 급정거로 인해 떨어진 줄 알았다. 변호사는 무의식적으로 떨어진 물건을 잡으려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떨어진 것은 끄트머리에 명품 브랜드 라벨이 달린 은회색의 줄무늬 넥타이 한 장이었다. 원래는 고급스러웠을 이 넥타이는, 누군가 세게 구겨 놓은 듯 형체가 망가져, 말린 생선처럼 뒤엉킨 채 뒷좌석 틈새에 끼어 있었다.
'피해자의 후두부에는 둔기에 맞은 상처가 있었으며, 사인은 질식이다. 흉기는 부드러운 천 종류로 스카프, 넥타이, 끈 등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의 뇌리에 수사 기록이 번뜩였다. 술기운은 삽시간에 증발했고,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장둥라이가 갑자기 뒷좌석을 힐끔 보며 말을 걸었다.
“류 변호사,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 많이 취했어? 아니면 속이 안 좋아?”
변호사는 황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 귀가 웅웅 울리고 손발이 얼어붙었다. 그는 간신히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조금 어지러워서요.”
장둥라이는 룸미러 너머로 그를 흘끗 바라봤다. 빛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류 변호사의 눈매에 어딘가 음울한 기운이 도는 듯했다.
다행히 장둥라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금세 옆자리에 앉아 있는 미녀와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류 변호사는 뻣뻣하게 굳은 자세를 유지하다가, 슬쩍 휴대폰 카메라를 켜 넥타이가 있던 자리를 찍었다. 이어 발끝으로 넥타이를 끌어내고, 서류가방으로 가리며 은밀하게 그것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넥타이를 집어넣기 위해 가방에 넣은 손을 마저 꺼내기도 전에, 장둥라이가 룸미러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류 변호사, 앞쪽에 있는 역에서 세워줄까?”
겁에 질려 심장이 멎을 뻔한 변호사는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장둥라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에어컨 온도가 너무 높아?”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불만을 터뜨렸다.
“더 낮추지 마, 나 추워.”
옆에서 이런 엉뚱한 소리를 보태는 아가씨가 없었더라면, 류 변호사는 벌써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장둥라이의 차에서 내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장둥라이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정중하게 물었다.
“류 변호사, 정말 괜찮아? 집까지 안 데려다 줘도 돼?”
변호사는 안면 근육을 억지로 당겨 붙인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다행히 여색에 홀린 장둥라이는 쓸데 없이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 줄 마음은 없었기에, 류 변호사로부터 확답을 듣자마자 곧장 액셀을 밟아 연기를 뿜으며 멀리 떠나갔다.
밤바람이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가자, 류 변호사는 그제야 자신의 등이 이미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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